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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순례길 시작점 생장에서 순례자 신고식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by 김로지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 - 프랑스길의 시작점은 파리에서 기차로 5시간 여 떨어진 생장 (Saint-Jean de Pied Port)에서 시작된다. (경유지: 바욘)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작은 마을인 생장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지역에 있으며,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의 시작이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고즈넉한 마을 생장은 실제로 중세 시대부터 유럽 각지에서 온 성지순례자들이 모여든 곳으로 유명하다.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순례길의 상징인 조개를 구매해 배낭에 매다는 순간, 순례자 신고식을 마치게 된다.



16.jpg 생장 (Saint-Jean de Pied Port)



2.png 초반엔 배낭을 메는 것조차 서툴다.



파리의 안락했던 친구 집에서 2박 후, 순례길의 시작점인 생장으로 떠나는 날. 도보 3분 거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아침 7시 8분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 5시 30분부터 준비해 6시 20분경 길을 나섰다.


그새 타지에서 친구가 있다는 게 의지가 됐는지, 길을 나서려니 어찌나 마음이 불안하고 떨리던지. 잔뜩 긴장하는 나에게 "아무도 가라 하지 않았다? 니가 선택한 거야." 라며 명언을 날린 친구. 너 T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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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여섯 시 반. 이 이른 시간에 역은 이미 승객들로 북적였고, 저 전광판에 내 기차 시간과 행선지가 뜨면 탑승구를 확인하고 가면 되었다. 30분 전인데도 탑승구가 안 떠있길래 역 안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기차에서 먹을거리를 샀다.


탑승 15분 전 플랫폼 위치가 뜨고 고맙게도 2박 동안 따뜻한 보금자리를 내어준 친구랑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혼자 개찰구를 넘어 기차로 향하는데 갑자기 다리 힘이 풀릴 정도로 떨리던 아기 순례자.


이제 다시 혼자다.



5.jpg 다행히 짐칸이 아닌 머리맡에 둘 수 있었던 오스프리 36L 배낭



여정을 준비하며 각 단계마다 걱정 포인트가 있었는데,


1. 파리에 도착하는 날은 교통 파업을 피해 친구네 집에 잘 찾아가는 것.

2. 파리를 하루 관광하는 날은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는 것.

3. 파리에서 생장으로 가는 날 (오늘) 기차를 놓치지 않고 짐칸에 둔 배낭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결국 걱정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걱정거리들은 나를 불안하게만 할 뿐이었다.


좌석에 앉으니 앞 쪽에서 어르신들의 익숙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순례길의 시작점인 생장으로 가는 경유지 바욘까지 가는 기차이니 여기 차있는 99% 이상의 한국인들은 예비 순례자일테다. 모국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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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찾아보니 생장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씨이던데 가는 동안엔 날이 화창하고 맑았다. 식당칸 가서 2.9유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사 오고 북적이는 파리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드는 기차 밖 풍경을 보는데 마음이 또 몽글몽글


재밌는 에피소드. 까친연 (미노의 구들 합 -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카페에서 운영하는 월 별 순례자 단톡방이 있는데 (ex. 1월 순례자 / 2월 순례자 등) 기차 탑승 후 내가 속한 4,5월 단톡방을 보니 똑같은 기차의 똑같은 칸에 타고 있는 젊은 여성분이 있는 거였다.


마피아 게임에서 밤이 오듯 '잠시 고개를 들어주시겠어요..?'라고 메세지를 보낸 다음 기차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뒷뒷뒷 옆 좌석에서 고개를 들고 똑같이 두리번거리는 작고 앳된 수진 씨를 처음 만났다. 고갯짓으로만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8.jpg 점점 등산복 차림에 익숙해져 가는 중.



9.jpg 바욘 (BAYONNE)



아침 7시 8분에 파리에서 출발한 기차는 11시 2분 경유지인 바욘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바욘 가는 기차는 미리 예약했는데 바욘에서 생장 가는 건 자리가 여유롭다고 들어 현장 발권하기로 했다.


기차에서 만난 수진 씨와 간단히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나누고 역 안으로 함께 발권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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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발권기 앞에 도착하니 누구보다 빠르게 도착해 있는 한국분들. 여기까지 걸으러 온 한국 분들이 이렇게 많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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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욘 출발, 생장행 기차 탑승객은 100% 순례자들처럼 보였다. 파리에선 혼자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등산복 차림이 이 기차에서는 모두 비슷한 차림에 큰 배낭을 메고 있어서 어찌나 반갑던지.


우측의 부부로 보이는 분들은 남편의 순례길을 응원하듯 창문에 사이에 두고 한참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의 목적지가 같으니 여기저기 들려오는 대화들. 벌써 N번째 순례길이고, 지난번에는 가을에 왔다던가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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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으로 가는 길. 파란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후에 데레사와의 통역을 도와준 분



기차에서 마주 보고 앉은 수진 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남편을 두고 혼자 떠나왔다는 사실과 나이를 듣고는 깜짝 놀란 대여섯 살 어렸던 수진 씨는 간호사로 일하다 떠나왔다고 한다.


생장에 가까워질수록 날이 흐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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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 (Saint Jean de Pied Port)



그렇게 약 1시간 뒤, 드디어 생장 도착.


예비 순례자들 모두 배낭을 메고 기차에서 내려 똑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해 길을 몰라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비가 조금은 내렸었는지 향긋한 풀내음과 선선한 날씨에 그냥 다 벅차기만 했다.


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가겠다고 수진 씨를 먼저 보내고는 뒤따라 천천히 걸었다. 의지할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이때까지는) 동행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최대한 혼자 헤쳐나가 보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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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국 (여권 발급, 루트 안내)에 가는 길은 중세 시대 영화 촬영장을 걷는 것만 같았다. 이 작디작은 마을에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 (Albergue: 숙소), 레스토랑, 등산용품점 등이 갖춰져 있다.



17.jpg 순례자 사무국 앞 배낭 행렬



순례자 사무실 오픈은 14시라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이렇게 배낭으로 줄을 세운 진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소매치기는 파리에서 무서웠지, 여긴 순례자들이 가득한 곳이니 대열에 무거웠던 내 배낭도 내려두고 마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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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되고 멋들어진 파리도 좋지만 중세 분위기 물씬 나는 이 마을은 완벽한 내 스타일이었다.


여기는 시작점이니까. 우연한 일이 잔뜩 생길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득 품은 이 마을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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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우연히 수진 씨를 다시 만났다. 잠시 시간을 때울 겸 근처 카페를 찾아 젤라또를 먹었다. (2.6유로) 카페의 첫 손님이었던 우리 뒤로 또래로 보이는 한국인 남성이 혼자 들어섰다.


저 사람도 혼자이니 말을 걸까 말까, 오지랖일까 아니면 우리가 말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을까 고민하다 그냥 가만있기로 했다. 외국에서는 한국인에게 말을 거는 게 가장 어렵다. 물론 한국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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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틱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수진 씨와 용품점을 찾았다. 눈이 많이 왔다고 들었어요. 걱정스러운 내 말에 사장님은 그저께는 눈이 와서 길이 정말 안 좋았지만 내일은 다행히 좋은 날씨에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4.png 모두 각자의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는 중



1시 40분쯤부터 다시 순례자 사무국 앞으로 돌아가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데 2시경 문이 열리더니 여성분이 "모두 준비되셨다면 시작할게요! 영어 하는 분?" 한다.


그러고보니 여기 줄 서있는 순례자들 모두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라 사용 언어에 따라 그룹 지어 담당자에게 배정되는 시스템. 이 사무국에서 순례자 여권 발급과 길 안내를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이 자원봉사자시라고.


앞 쪽에 젊은 한국인들과 어떤 외국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갔을 때 한국인 친구들이 많았다며 서툰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도 할 줄 안다던 이탈리아 남자는 곧 소개할 프란체스코였다. 작은 우연과 만남들이 계속해서 인연을 만든다.



25.png 설명을 재밌게 해주었던 까트린



내 순번이 돌아왔을 때, 나는 영어+한국인 조합으로 묶였다. 본인을 까트린이라고 소개한 봉사자분께서 먼저 코스 설명을 해주시는데, 중요한 정보는 순례길 첫날 (바로 내일) 2개의 루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첫 번째 나폴레옹 코스는 피레네 산맥을 제대로 느끼며 하이킹할 수 있고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지만 편의시설이 거의 없는 데다 (운 좋으면 푸드 트럭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더 힘든 길이라 날씨가 좋지 않은 겨울이나 폭우 등의 예보에 따라 루트를 폐쇄하는 일이 빈번한 코스.


두 번째 발카를로스 코스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라 나폴레옹 코스 대비 예쁜 길은 아니지만 바르 (BAR, 음식과 커피 등을 파는 바) 같은 편의시설들이 종종 있어 초보자에게는 적합한 코스라고. 나폴레옹 코스가 막히면 빼박 발카를로스 코스를 타야 하는 것이었다.



뭐든 뷰가 가장 중요한 나에게 발카를로스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다행히 내일은 날씨가 괜찮아서 나폴레옹 코스가 열린다고 했다. 바로 어제 헬기가 뜨는 위급 상황이 생길 정도로 날이 안 좋았다더니 정말 럭키였다.


코스 소개 외에도 내일 출발 시 어느 길로 시작해야 하는지, 주의사항이 뭔지, 헷갈리는 길은 특히 더 주의를 주셨다. 어떤 길에서 헷갈리면 다시 순례자 사무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우리가 다시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26.png 첫 날부터 '가장 힘들고 긴 구간임을 감안' 해야 한다는 건 가혹하지 않아요?



한국인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국어로 된 안내문도 받았다.



27.png 크레덴시알에 첫 세요가 찍혔다.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2유로에 발급받았다. 이름과 국적 등을 차례로 말씀드리고, 첫 쎄요 (도장)을 찍으니 너무 설레잖아..


앞으로 내가 순례자라는걸 입증해 줄 여권이며, 숙소 혹은 특정 장소에서 기념 도장을 찍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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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덴시알에 첫 세요를 찍고, 배낭에 매달 조개도 2유로 기부하고 겟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성 야고보의 시신이 조개껍질로 뒤덮여 안전히 산티아고 바다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가 있어 조개는 순례길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길은 성 야고보의 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며,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성 야고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성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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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국에서 신고식을 마친 후 다음 할 일은 오늘 묵을 숙소를 잡는 거였다. '생장 55번 알베르게'는 사무국과 가까운 위치와 뷰, 나쁘지 않은 시설로 유명한 숙소였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고 배낭은 먼저 두어도 되지만 체크인은 4시부터 라길래 배낭만 얼른 내려두고 나왔다.


숙소 가격은 순례자를 배려한 12유로 (당시 한화 약 13,000원). 순례길 대부분의 숙소들은 대부분 저렴한 가격으로 묵을 수 있다. 단 호텔이나 룸 컨디션에 따라 비싼 방도 물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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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은 까르푸. 파워 J가 이번 여행만큼은 내려놓고 싶어 많이 알아보지 않았더니 배고파서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들이 모두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이때까지 먹은 것은 아침 8시쯤 기차에서 먹은 샌드위치가 전부-


근처에 마트 없냐고 물어물어 찾아간 대형 까르푸에 도착하니 순례자들이 이미 내일 필요한 간식+오늘 저녁거리 등을 구경하는데 수진 씨한테 연락이 왔고 까르푸에서 다시 만났다.


나폴레옹 코스를 간다면 푸드 트럭이 없을 수도 있는 것, 그리고 20km 넘게 가파른 등산길을 넘어야 하는 것을 대비해 물과 간식을 넉넉히 사두시길 권한다. 숙소에서 마실 맥주와 물인 줄 알았던 탄산수, 그리고 간식 조금 사고 6.19유로 지불 (약 9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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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할 일은 동키 서비스 예약. (바쁘다 바빠) 동키 서비스는 배낭을 맡긴다는 의미로 한국인들이 주로 칭하는 말이고 보통 딜리버리 서비스 'Delivery Service'라고들 했다.


배낭을 묵었던 숙소에 두고 가면 다음 목적지까지 알아서 옮겨주는 시스템. 간단히 무거운 배낭을 메고 싶지 않은 순례자를 위한 시스템이다.


가뜩이나 체력도 바닥일 텐데 첫날이 가장 힘들다길래 7kg 배낭을 메고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숨이 넘어가고 싶진 않아서 첫날 동키를 이용하기로 했고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내일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까지 갈 건데 55번 알베르게에 머무르고 있어. 배낭 2개 보낼 거야' 하면 알겠어하고 봉투를 주는데 여기에 5유로 (였던 것으로 기억)를 넣고 배낭에 매달아 아침에 출발 전 그대로 두고 나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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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하고 나니 드디어 4시 체크인 시간이 되어서 숙소로 왔다. 체크인을 함께 했던 수진 씨랑 나란히 2층 침대 옆자리를 배정받았고 (2층의 비밀은 나중에 밝혀진다.) 55번 알베르게에 이미 한국인만 6명 이상 있는 듯했다.


침낭도 꺼내고 (여행에서 침낭을 챙겨본 일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바로 아랫 베드의 나이 지긋하신 여자분이 자꾸 코를 가리키며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왔다.


계속 알아듣지 못하자 건너편의 외국인 남성이 합류해 '본인이 코를 많이 고는데 너 귀마개 있냐고 물어보네.'라고 통역을 도와주었다.


코골이 예고를 한 사람은 스페인 사람 데레사, 친오빠인 페르난도와 함께 이곳을 찾았고 본인은 발카를로스 코스로 가고 싶은데 오빠가 나폴레옹 코스로 가자고 해서 자긴 내일 죽었다며 귀마개 꼭 잘 끼라고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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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정리를 마치고 뒷문으로 나왔더니 보이는 풍경-


평소 같았으면 오늘의 계획은 모두 엑셀로 정리되어 있었을 테다. 브레이크 타임을 피해 정확한 타이밍에 식당을 갔을 것이고, 까르푸에서 미리 정리했던 리스트대로 장을 봤겠지. 당일 묵을 숙소를 당일 알아본다는 것도 있어선 안될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컨트롤하며 내 계획을 빈틈없이 실행하러 떠나온 순례길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이 만들어주는 대로, 낯선 상황에 놓인 나를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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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베드인 수진 씨와 함께 마을 초입에 있던 호텔과 레스토랑을 겸하는 곳을 찾았다.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매우 친절했던 종업원이 주류를 안 시킨다고 하니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버렸다.


25유로 (약 36,000원) 짜리 스페셜티 코스에 양고기, 라임주스, 프렌츠 프라이, 샐러드 포함이길래 음료 주문을 안 했던 건데 메인 디쉬만 나오길래 '라임주스는 언제 나와?' 하니까 불쾌한 표정으로 '여기 양고기에 소스로 올라가 있어.' 하던.


옆 테이블은 계산할 때 자리에서 바로 해주더니, 나갈 때 계산하려고 부르니 '카운터에서 직접해' 하길래 작은 일에 스트레스받지 말자 싶어 계산하고 나왔다. 수진 씨랑 한참을 이게 인종차별인지 아닌지 얘기하다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쿨한 척 결제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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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도무지 해가 지질 않는다.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고 나왔더니 꾀죄죄한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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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가 넘어가니 조금씩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열악한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 후 누우려다 야경을 보고 싶어 아까 양들이 있던 자리로 다시 올라왔고, 낮보다 확실히 날씨가 쌀쌀해졌다.


새벽 5시 30분부터 시작한 오늘 하루, 아침엔 파리에 있었는데 영상과 이미지로만 봐왔던 생장에 도착한 데다 내일부터 800km를 걷는 여정이 시작된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내일부터는 두 발로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넘는다!


긴장감은 사라지고 설렘만 남았다. 오늘 하루 만난 모두가 설레는 모습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다. 순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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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오니 공용 주방에서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술파티가 벌어진 것 같았다. 평소라면 분명 합류했을 테지만, 내일은 중요한 시작날이니 컨디션 관리 차 일찍 침낭으로 들어갔다.


절제하는 스스로가 새삼 기특하면서도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날 저녁, 귀마개를 잘 꽂으라는 데레사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아랫 베드의 그녀는 천둥 같은 코골이 소리를 내었고, 귀마개라는 걸 처음 껴보는 나는 작게 압축시킨 뒤 귀에서 팽창하게끔 꽂아야 한다는 걸 모른 채 마구 쑤셔 넣었다가 데레사 코골이에 깨고,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빠져버린 귀마개를 찾느라 새벽 시간을 모두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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