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1일 차 생장~론세스바예스 25km
Camino De Santiago
순례길에서 가장 많이들 궁금해하는 부분은 걷다가 어디에서 쉬고 어디에서 자냐는 것. 부엔 까미노 앱을 통해 800km 루트 안에 있는 모든 마을 정보와 고도 등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컨디션 혹은 가보고 싶었던 마을에서 하루를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생장에서 프랑스길을 시작하고, 나폴레옹 루트를 탄다면 선택지는 세 가지.
첫 번째는 생장에서 8km 정도 떨어진 오리손 산장에서 멈춘다. 다만 오리손은 베드가 많지 않기 때문에 예약이 일찌감치 마감된다. 그리고 km가 너무 짧기 때문에 피레네 산맥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어도 대부분
두 번째 방법인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까지 25km 정도를 걷는다.
세 번째는 론세스바예스 숙소가 풀부킹이라 그다음 마을까지 걷는 것. (최악이다.)
다닥다닥 붙은 2층 침대들이 가득 찬 방. 남녀 혼성 10명이 넘게 몸을 뉘인 도미토리에서 잠을 청한 첫날, 코를 많이 골 거라는 아랫 베드 데레사에게 귀마개 있어서 괜찮다고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다 합쳐서 5시간도 자지 못했다.
'귀마개를 꽂았는데 코 고는 소리가 왜 이렇게 잘 들리는 거지?' 하면서 깨면 귀마개는 없어져있고, 그 어두컴컴한 도미토리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조용히 귀마개 찾고 끼고 빠지고 찾고 무한반복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찾아보니 '올바른 귀마개 착용법'이라는 게 있었다.
새벽 4시에 정보 습득 후 귀마개 제대로 끼고 바짝 꿀잠 잤다.
그렇게 잠을 설치다 6시 정도에 번쩍 눈을 떴는데 옆 베드에 있던 수진 씨는 물론 같은 방 동지들 대부분이 이미 없다? 당황해서 재빨리 세수하고 모자 푹 눌러쓴 다음 짐을 챙기는데 처음이라 서툴러서 짐 싸는데만 시간이 엄청 소요됐다. (특히 침낭을 다시 패킹해서 배낭에 넣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
어제 술자리가 한창 펼쳐졌던 공용부엌으로 나오니 이미 무료 제공 아침까지 챙겨 먹고 나갈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한가득. 다들 어쩜 이렇게 부지런한 거냐고.
새벽 6시 30분이었지만 이왕 늦은 거 (?) 오늘 나폴레옹길에는 중간에 쉬어갈 바르 (BAR, 음료나 먹을거리를 파는 곳)도 없다고 했으니 알베르게의 무료 식빵이랑 커피 챙겨마시고, 동키 서비스 (다음 목적지까지 배낭을 보내는 시스템)를 이용하기 위해 몸에 지고 갈 짐을 고민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옆 테이블에서 어떤 여성분과 쉬지 않고 떠들던 남자가 내 신발 얘기를 하는 것 같길래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혹시 오늘 우비를 챙겨가는 게 좋을까? 동키 보낼 건데 지금 뭘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어."
"오늘 고도가 높아서 날씨가 어떨지 몰라. 나는 항상 배낭 가장 위칸에 우비를 두고 다녀"
"그럼 챙기는 게 좋겠다. 고마워!"
그렇게 7시경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왔는데
...
길을 모른다!
8년 동안 다닌 회사도 네비 안 찍으면 아직도 못 찾아가는 길치가 프랑스 작은 마을 한복판에서 길을 어떻게 알겠나. 분명 어제 루트 설명도 들었는데 당연히 사람들 뒤따라가면 되겠거니 싶어서 귀담아듣지 않았더니 (어차피 들어도 모를게 100%였기 때문에)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당황했다. 맞다 모두 출발했지.
당황해서 그냥 알베르게 앞에 있던 의자에 무작정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아까 그 남자가 나와 걷기 시작하길래 뒤따라 가기 시작. 그러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을 걸었다.
"난 이탈리아에서 온 프란체스코야. 너는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 처음 왔어? 알베르게 어땠어?"
그게 장장 10일을 같이 걷고, 마지막 날 대성당 앞에서 마무리를 같이한 프란체스코와의 첫 만남. Angels of Camino라는 왓츠앱 방에서 아직도 맨날 떠드는 소중한 내 까미노 식구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기대치도 못했던 동행이 시작됐다. 30대 중반의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온 프란체스코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려 까미노를 선택했고, 나는 남편을 두고 혼자 오게 된 계기를 포함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는데 한국인 친구들이 꽤 있었다며 반가워했다.
무작정 걸으러 떠나온 나와 달리, 종교적인 이유로 걷는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해 종교를 물어보니,
"나는 신은 믿지 않아. 대신 세계 (Universe)를 믿어. 내가 좋은 것을 하면, 분명 좋은 것을 되돌려준다고 생각해!"
라고 한다. 걷는 내내 '벨리시모!'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뜻이라고 했다.)를 반복하는 그의 눈은 아이처럼 순수하고, 신났고 천진난만했다.
프란체스코의 배낭 아래엔 Ulisse라는 차 번호판의 미니 버전 같은 게 붙어있었는데 본인 차 이름이라고 했다. 원래는 다마스를 개조해 유럽 일주를 떠날 계획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탈리아도 예쁜 곳이 많은데 국내 여행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1년 동안 국내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는 프란체스코.
마을을 빠져나가자 대화를 지속하기 힘들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샛소리만 가득 들려오는 길, 풀내음이 진하게 물들어 있는 이른 아침의 시원한 공기, 호수 같은 운해와 이슬을 가득 머금어 더 싱그러운 풀잎들까지.
우당탕탕하는 시작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덕분에 이 멋진 풍경도 보고 (더 일찍이었다면 분명 어두웠겠지.) 쉴 새 없이 떠드는 유쾌한 프란체스코도 만나고, 북적거리지 않아 온도와 습도, 바람과 풀내음을 잔뜩 느끼며 걸을 수 있었다.
그 먼 한국에서 어떻게 순례길을 알고 찾아왔는지 궁금해하는 프란체스코에게 스페인 하숙을 통해 알게 된 계기를 설명해 주니, 프란체스코는 영화 '더 웨이'라는 걸 보고 알게 됐다고 한다.
아들이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난 어느 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사망했다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된 의사 아버지는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이곳에 왔다가 아들이 가려던 길이 궁금해져 아들의 장비를 들고 순례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아픔을 치유한다는 이야기였다.
혼자인 여행은 감흥을 나눌 이가 없어 작은 쓸쓸함이 있다. 근데 까미노 첫날, 나는 감흥을 나눌 친구가 있었다.
"프란체스코. 여기 진짜 동화 속에 나오는 길 같지 않아? 나는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어!"
"로지, 이거 봐봐 풀들에 이슬이 엄청 많지? 와 여기 봐봐. 소도 있어!"
잠시 후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는 이탈리안 커플을 만났다. 초반엔 서로 영어를 하다가 이탈리안인걸 알고 반가워하며 이탈리아어로 대화하는 게 재밌었다. 뒷모습만 봐도 한국인임을 알아보는 게 국룰이거늘..
어제 하루 간간히 만나 시간을 함께 했지만, 자연스레 오늘의 일정은 맞추지 않았던 수진 씨처럼 이미 한 시간 이상을 함께 걷고 있었지만, 프란체스코와 끝까지 같이 가기로 하진 않았다 보니 내가 기다리고 있으면 프란체스코 (이하 프라)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았다.
잠시 프라를 기다리다가 좋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며 혼자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뛰어온 프라가
"미안미안. 이탈리아 사람들을 만나서 반가웠는데 강아지를 숙소에서 안 받아줘서 어쩔 수 없이 텐트를 치고 자야 했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더라. 많이 기다렸지?" 한다.
우리 동료가 된 거니?
생장에서 8km 지점의 오리손 알베르게에 다다를 때 즈음 말과 함께 걷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한 번도 안 쉬고 잘 걷는 프라와 달리 이미 평소 운동 치사량을 넘어서버린 나. 오리손 산장에서 잠시 쉬어가자고 얘기를 한 다음 야외에 자리를 잡았는데 절경이다. 아직도 갈 길이 많지만 만약 오리손 알베르게를 첫날 숙소로 잡았다면 코스가 너무 짧아 아쉬웠을 것 같았다. (생장에서 오리손까지 딱 2시간 소요.)
자기는 괜찮다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라의 것까지 사 왔다. 만약 프라가 아니었다면 아직 숙소 앞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 시간에 거기 있어준 것도 고맙고, 앞이 막막했던 첫날 함께 걷는 동료가 될 수 있어 고마웠다.
쉬고 있는데 수진 씨 포함 같은 알베르게에서 뵈었던 한국 분들이 도착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분명 우리보다 빨리 출발했을 텐데 어쩌다 우리가 추월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오는 길에 어제 까르푸에서 샀던 물이 탄산수였다는 걸 알았다. 프라한테 물인 줄 알았더니 탄산수다? 하니까 ‘그럼 병을 막 흔들었다가 열어. 그리고 그걸 열 번 정도 반복해!’ 하길래 웃고 한 귀로 흘렸고, 오리손에서 마신 이 오렌지주스는 인생 최고의 주스였다.
말과 함께 천천히 걷던 남자를 금세 따라잡았다. 프라는 또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말이랑 같이 걷고 있어요? 정말 대단해요! 말 이름이 뭐예요?"
벨기에에서 온 닉은 그의 말 헤라클레스와 함께 집 문을 열면서 순례길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벨기에에서 지금 프랑스를 지나 이미 1,000km 가까이를 걸어 스페인을 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같은 유럽 내에서 집 문을 열면서부터 까미노를 시작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제 곧 헤라클레스 생일인데 말을 받아주는 숙소가 많지 않아 숙소 중심가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며. 가끔 말을 타기도 하냐는 내 질문에 평지에서는 타기도 하지만 지금은 너무 오르막길이라 헤라클레스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가다가 자주 멈춰 반경 2M 온 풀을 뜯어먹는 헤라클레스와 그를 가만히 지켜보는 닉이 세상 평화로웠다.
한참을 닉과 프라와 얘기하며 같이 걷고 있는데 옆에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여자에게 "봉주르! 부엔 까미노!"라고 말을 건넸다.
이건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함께한 Angels of Camino 두 번째 멤버 바바라와의 첫 만남.
캐나다에서 온 바바라는 캐나다 국립공원에서 일하며 북극에서 6년 이상 거주한 경험과 수많은 하이킹 경험을 가지고 있던 베테랑 하이커. 엄마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작년에 은퇴한 후 딸과 함께 이스라엘 1,000km 하이킹을 마치고 막 순례길을 시작한 거였다.
바바라도 첫날 무리하고 싶지 않아 배낭 동키 보냈다길래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고 얘기하는데 옆에서 너넨 진짜 하이커가 아니라던 프라, 어떻게 첫날부터 동키를 쓰니 마니 너는 무거운 배낭 메서 좋겠다고 장난치며 그렇게 셋의 까미노가 시작됐다.
첫날이 가장 힘들었다고 누구나 입을 모아 얘기하지만 바바라, 프라와 함께 배꼽 빠지게 웃고 떠들며 걷다 보니 힘듦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평소에 잘 걷지도 않았던 내가 벌써 4시간 이상을 걷고 있는데, 각 나라 동물 소리만 얘기해도 웃기고 마치 오랫동안 봐온 친구들처럼 쉴 새 없이 농담을 나눴다.
"바바라, 로지 진짜 웃겨. 얘 오르막길에서는 말이 없고 평지 나오면 '플랫!!!' 하면서 엄청 좋아해."
"우리 지금 너무 떠들고 있어서 사람들이 욕할 거야. 목소리 좀 제발 줄여 프라"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모두가 지쳐가는 와중 마치 함께 떠나온 사람들처럼 왁자지껄하게 걷는데 첫 번째 까미노 비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빠른 페이스의 둘을 쫓아가느라 겉옷 제대로 입고 정비할 새도 없이 무작정 걷느라 상태는 메롱.
그리고,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넘었다. 작은 표지판이 있는데 사람들이 사진 찍으며 모여있길래 알았다.
이제 '봉주르'아니고 '올라'하는 스페인이다!
근처에 음수대가 있었다. 론세스바예스까지의 나폴레옹길은 이 음수대가 몇 없기 때문에 생장에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길이었다. 나도 당장 탄산수를 따라버리고 물을 가득 채웠다.
사진 속 한국인 여성분과 남성분이 참 보기가 좋아서 커플이냐고 물어보니 미국에서 온 남매였다. 부모님은 저 뒤에서 오고 계시다고 하는데 '정말 남매가 같이 이렇게 걸을 수 있다고요?'가 엄마 아둘 둔 내 궁금증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동안 몇 명에게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활발했던 성격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불필요한 만남을 차단하고, 낯을 많이 가리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무장해제 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긍정 기운이 넘쳐나는 것 같잖아!
오늘은 200m에서 출발해 고도 1,400m 지점까지 쭉 오르는 날이었다. 길은 나름 잘 닦여있는데 1,200m 등산이 어디 쉬우랴..
바람이 점점 더 심해져 가는 도중, 해발 1,400m 지점에 다 와간 것 같을 때 대피소가 나타났다. 바바라가 '나는 안 쉬어도 되는데 너네 쉬고 싶으면 쉬었다 가자.'하고 프라는 '나도 괜찮아. 로지 쉬고 싶으면 쉬고 가자.' 하길래 진짜 꾹 참고 '그럼 나도 괜찮아!' 하고 이 쉼터를 패스해 버렸다.
사실 아까 푸드트럭부터 쉬고 싶었는데, 왜 나만 힘든 거지 싶게 잘 걷는 사람들. 둘을 먼저 보내고 혼자 쉬었다 가도 됐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탁 트인 파릇파릇한 길들을 지나 이런 숲 속 길도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던 걸로 기억. 친구들에게 지금 내 스틱이 도움이 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별로 유용한 것 같지 않다고 했더니 프라는 혹시 모를 상황 (넘어져서 한 손으로 땅을 짚어야 할 때)에 대비해 스틱을 1개만 짚고 바바라는 경사가 심한 내리막에서만 짚는다고 한다.
그 후 점차 스틱이 익숙해져 간 김로지는 스틱 없이는 까미노를 끝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한다.
갈수록 날씨가 점점 더 안 좋아져 오르는 동안 봤던 황홀했던 풍경들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고도가 높아서 더욱 정신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바람막이 모자 푹 뒤집어쓰고 정신줄을 놓지 않게 걸었고, 숲 속 길부터는 쭉 내려오는 길이라 수월할 줄 알았더니 이미 아침 7시부터 6시간 넘게 걷고 있는 상황에 다리 힘이 풀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론세스바예스까지 정말 몇 km 남지 않았을 때 보였던 작은 교회
오후 두 시, 론세스바예스 도착
(생장-론세스바예스 25km, 7시간 소요)
아침 7시경 출발해 오후 2시, 드디어 오늘의 도착지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빠른 페이스의 프라와 바바라 속도에 맞춰 몇 번 쉬지도 않았는데도 꼬박 7시간이 걸렸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고, 여기에 배낭까지 있었다면 어땠을지. 동키 보낼 생각했던 스스로가 정말 기특했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분들은 모두 네덜란드 분이셨다.
궁금한 것 못 참는 프라가 질문하니, 지난 50년 간 네덜란드 분들에 의해 운영하는 시설이라고 했다. 도착한 순례자들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격려해 주는 전통이 있단다.
막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있던 시점이라 체크인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했다.
잠시 부엌에 들어가 간식을 꺼내먹으며 기다리는데 평소 운동량이 극히 적었던 나, 하루 7시간 꼬박 25km가 되는 길을 내 두 발로 걸어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니 이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거기다 오늘만 해도 길에서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났는지, 가슴이 벅찼다.
베테랑 하이커 바바라는 목에 걸고 있던 작은 맥가이버 칼을 꺼내어 배낭에서 당근과 야채, 치즈 등을 꺼내 잘라 나눠주었다.
하도 숙소는 미리 예약하면 좋다길래 한국에서 유일하게 예약하고 왔던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 약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공립 알베르게이지만 론세스의 유일한 숙소이기 때문에 여기에 자리가 없다면 다음 마을로 넘어가야 한다. (호텔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비싸다.)
실제로 생장 55번 알베르게에서 같은 도미토리를 썼던 한국인 남성분이 3시경 여기에 도착했는데 자리가 꽉 차서 다음 마을로 넘어가셨다고, 이후로 그를 볼 수 없었고 모두의 전설로 남았다.
알베르게계의 호텔이라고 불리는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 이 때는 단순히 어제 잔 55번 알베르게보다 훨씬 좋네! 수준이었는데 끝날 때까지 이런 시설은 사립이라도 드물었다. 깔끔하고 청결한 공간, 옆과 분리되어 있는 시설들 그리고 어떤 방은 모두가 1층만 있는 싱글베드더라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방을 배정해 주는지 우리 층은 거의 다 한국인들이었고 내 아랫베드는 귀여운 20대 여성분, 내 옆 베드는 이후로 특별한 인연이 된 형상 씨, 그리고 또 그 아래는 까미노 패밀리 중 하나인 대만인 마틴의 자리였다.
눈이 마주쳐서 "안녕하세요~" 하니 "I am not Korean. (나 한국인 아니야)"라고 했던 마틴, 어딜 가나 한국인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한국인처럼 생겼던 친구를 만났다.
그나저나 나는 왜 또 2층 베드를 배정받은 걸까. 분명 2층 베드는 나이가 어린 순례자들에게 배정한다고 했는데 내 아랫 베드는 20대. 오르고 내릴 때마다 하루 7시간 걷게 한 다리가 죽을 듯이 아우성을 쳐서 건너편 마틴이 마사지크림 바를래? 하고 줄 정도였다.
샤워하고 빨래하고 나오니까 이렇게 텐트가 쳐져있다. 와 정말 백패킹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베드 정리해 두고 샤워한 후 빨래하러 내려왔는데 다 한 빨래를 드리면 이렇게 탈수기에 한 번 돌려주신다. 항상 이렇게 탈수를 할 수 있구나! 생각은 금물. 앞으로 이런 곳은 없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챙겨 온 빨래집게와 함께 널어놓으면 빨래 끝.
순례자들이 다 이렇게 빨래를 널고 있길래 누가 내 옷이나 속옷을 고의로 혹은 실수로 가져가면 어떡하지? 하는 초반의 걱정이 무색하게 마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하다 보니 오늘 하루 입은 속옷을 널어놓는 부끄러움도 잠시, 내 지친 몸은 부끄러움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론세스바예스에는 마트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는데 멀고, 내 다리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대신 숙소 안에 자판기가 있어 음료수나 간단한 간식을 해결하거나, 아니면 순례자 메뉴를 신청해 다 같이 먹을 수 있다.
체크인할 때에 석식을 예약할 것인지 물어봤었지만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한국에서부터 오늘을 위해 챙겨 온 단 하나의 라면입니다.
라면 뽀글 이해서 국물 먹는데 엄마..... 그동안 나 운동도 안 하고 진짜 편하게 살아왔네
라면 흡입하고 다리 부여잡고 베드에서 쉬고 있는데 바바라한테
"로지, 프라랑 부엌에서 내일 계획 짜고 있는데 혹시 괜찮다면 너도 함께 할래?"라고 메시지가 왔다.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떠나온 순례길에서 너무 일찍 동행이 생겨버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잠시, 오늘 나는 이들과 함께여서 어느 순례자보다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이들과 헤어져 걷는 건 당장은 원치 않는다는 걸 느꼈다. "좋아! 바로 내려갈게" 하고 내려가 내일 루트에 대한 열띤 토론을 구경했다.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취침 시간이 됐는데 빨래가 안 말랐길래 다 걷어와 베드에 걸었다. 집에선 건조기가 뽀송뽀송하게 다 말려줬을 텐데.
옆 베드 영상 편집 일을 그만두고 떠나온 형상 씨와 직업 관련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29세들이 많았는데, 아마 30대가 되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30대 별거 없고,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꼰대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속으로 삼키고 귀마개 잘 꽂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