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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두 번째 대도시 로그로뇨, 상념의 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7일 차 토레스 델 리오~로그로뇨 20km

by 김로지


Camino de Santiago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길에 오르기 전, 너무 많은 응원을 받아 중도 포기도 못하겠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했던 적이 있다.


단 7일 만에 심리적 체력적 한계에 부딪혀 걷다가 펑펑 울고 싶은 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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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한 번쯤은 봤다는 기가 막힌 일출을 못 본 지 7일째. 작디작은 마을 토레스 델 리오에서 오늘은 5시 30분 알람을 맞추고,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바바라와 마틴과 함께 알베르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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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팜플로나 이후 두 번째 대도시인 로그로뇨까지 가는 날, 거리는 20km 미만으로 얼마 안 되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체온은 더 떨어지고 컨디션이 유독 안 좋았다.


머물렀던 마을은 너무 작아 아침을 챙겨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았고, 어제 30km을 걷는 무리 때문인지 배낭은 더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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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앞서간 프란체스코가 머물렀다고 했던 Viana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땐 이미 2시간 가까이를 걷고 있던 때였다. 항상 셋이 같은 마을과 같은 알베르게에 머무르다 처음으로 떨어진 날이기도 했는데 수다스러운 프라는 헤어진 뒤에도 왓츠앱으로 비아나가 너무 예쁘다느니,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밥 먹으러 왔다느니 떠들어댔다.


프라가 없는 덕분에 바바라와 마틴과 차분한 하루를 이어갔지만, 6일을 내리 함께 걷다가 떨어지니 또 그것대로 허하고 아쉬웠었다.


어쨌든 비아나는 프라의 말대로 정말 예쁘고 아기자기한, 토레스 델 리오보다 훨씬 더 규모 있는 곳이었지만 너무 이른 시각 출발한 탓에 문을 연 바르(Bar)나 슈페르메르카도 (슈퍼마켓)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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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려 판초우의까지 처음 꺼내었던 날, 그 새벽에는 나름 상쾌하고 운치 있는 분위기에 향긋한 풀향이 좋게도 느껴졌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늘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는 30km를 걸은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4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는데, 한 방에 최소 8명 이상이 자는 도미토리에서 누군가는 무조건 코를 골고 그걸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내 귀마개는 시도 때도 없이 귀를 탈출했다.


그래서 분명 귀마개를 꽂고 잤는데 코골이에 눈을 뜨면 귀마개는 온데간데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용히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비좁은 침대와 침낭 속을 비춰 이탈한 귀마개를 찾아낸다. 그걸 새벽 내내 반복하다 보니 내 귓구녕이 작은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무튼 그렇게 어지럼증까지 겹쳐 휘청거리기까지 하며 바르를 찾고 있을 때쯤, 지나가는 행인에게 문을 연 바르를 물었고 스페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자 직접 데려다주셨다. 작은 호의에도 계속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단비 같은 카페에서는 처음으로 또르띠야 (스페인의 전통적인 감자 오믈렛)을 시켰고, 따뜻한 카페 콘 레체 (카페라테)와 허겁지겁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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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바바라와 앞서 걷고 있던 마틴에게 길을 헷갈리지 말라는 메시지가 왔다.


혼자 있으니 발맞춰 빨리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쉬고 싶은 대로 쉴 수 있었지만 나는 왜 오늘 아침 이들과 떨어졌을까, 왜 이리 뒤처졌을까. 야속했다.



KakaoTalk_20250323_121946248_05.jpg 다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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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걷고 있는 나바라주 (주도 이름)에는 유독 포도밭이 많았는데 포도송이는 잘 보기 힘든 어린 나무들이었다. 와인이 유명했던 나바라주, 와인이 유명해 포도밭이 많은 건지 포도밭이 좋아 와인이 유명한 건지 궁금했다.


문제는 이 포도밭이 펼쳐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오늘따라 사람이 왜 이리 없는지. 저 멀리서 걸어오던 마을 주민 같은 할아버지가 부엔까미노, 하시며 악수를 청하길래 마침 어제 독일 순례자에게 악수로 축복의 기도를 받았던 터라 손을 내미니 손등에 뽀뽀를 했다. 그러더니 양쪽 볼에 비쥬를 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길래 얼른 자리를 떠버렸다.


호의인지, 어떠한 사심인지 알 수 없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포도밭과 나만 있는 이 환경이 무섭게 느껴지던 와중, 다이앤을 만났다. 길에서 한 번 짧게 마주쳤었지만 오늘 유독 무서운 나와 달리 비가 와서 태양이 없잖아! 하며 좋아하는 그녀에게 방해되지 않으려 앞서 걷고 있었다.


다이앤에게 용기 내어 말을 걸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온 71세의 다이앤은 5년 전 부르고스부터 걸었다가 생장부터 걷지 않은 게 후회가 되어 다시 왔다고 했다. 3번째 까미노는 할 수 있을지 모르니 이번에 꼭 완주하겠다는 그녀는 포토밭의 포도들이 가게에서 파는 포도가 아니라 와인용인 것도 알려주고, 가을에 오면 3배 이상 커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함께 약 1시간 정도를 걸어 로그로뇨에 도착했을 때, 목적지로 택시 이동을 한다는 그녀와 우리 꼭 산티아고에서 만나자며 포옹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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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가운 내 친구들이 있는 카페를 찾았다. 보고 싶었어 바바라와 마틴 (어제부터 프라의 자리를 마틴이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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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어제 앞마을 Viana에서 묵었던 프란체스코까지 합류해 로그로뇨 공립 알브레게에 함께 체크인했다.


2층 베드를 받아 망연자실한 나에게 프라가 본인의 1층 베드 5유로에 판다고 장난을 쳤다. 오늘처럼 힘들었던 날에 너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아니면 순례길은 원래 이런 건데, 그동안 내가 운이 좋아서 너희와 함께 걸을 수 있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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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베드는 엄마의 요청에 따라 (?) 남동생과 함께 휴학 동안 온 20대 한국인 친구가 있었다. 어머님이 이 앞에 성당에 가자고 하니 투덜투덜하는 남매를 가만히 보며 가족끼리 함께 이 멋진 추억을 쌓을 수 있다니 부러웠다.


등산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무릎이 많이 좋지 않아 장거리 도보 여행은 어려운 아빠와, 직업적으로 한 달이 넘게 쉬지 못하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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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바르, 숙소에서 간간히 계속 마주치던 한국인 무리가 있었다. 특이하게도 어르신들과 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합이었는데, 이들을 보고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인들은 왜 함께 다니냐고 여러 번 물어봤었다.


나 역시 함께 다니진 않아도 그들을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기에 이 먼 타지에서 같은 백의민족이라는 동질감, 그리고 심적 의지에 대해 마음만큼 설명할 수 없어 웃고 넘겼다.


마침 라면을 끓여드시려던 차에 감사하게도 함께 먹자는 제안을 해주셔서 함께할 수 있었다. 유독 힘들고 지쳤던 오늘, 한국 분들과의 식사 자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근데 웬걸, 라면이 이렇게 매울 수가. 앉은자리에서 청양고추 5개는 씹어먹는 내가 고작 일주일 넘게 고춧가루를 입에 안 댔다고 너무 맵게 느껴졌다.


라면 값도 받지 않으시고 선뜻 마음을 내어주셨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설거지로 보답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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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좋아 혼자 산책을 나왔다. 이쯤 되니 마냥 재밌고 신기했던 기분들을 넘어 상념이 생겨나는데, 기분에 잠식되지 말고 이 순간들을 즐기기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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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유심을 사러 까르푸에 다녀왔다. 유심 만료일이 다가오다 보니 한국에서부터 하나 더 예비로 챙기지 않은 게 매우 후회스러웠다. 토요일이라 시내의 핸드폰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서, 2km 떨어진 까르푸에 걸어갈까 고민하다가 오늘 같은 컨디션으로 왕복 4km는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버스를 탔다.


고작 7일을 내리 걸었다고 버스 탄 스스로가 적응이 안 되었다. 왠지 창밖에 걷는 사람들도 낯설고, 이 바퀴가 굴러가는 느낌도 낯설어 신기했다.


까르푸의 핸드폰 매장 점원은 내가 들어가는 걸 뻔히 보고도 친구들과 문 앞에서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고,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스페인어를 고수했으며, 번역기를 켜서 대화를 시도하는 나를 짜증스럽게 생각했기에 오늘 내 기분에 엔딩을 찍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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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쯤 다시 만난 우리 (바바라, 프란체스코, 마틴) 프라가 가보고 싶다는 어떤 놀이? 과학? 박물관에 갔는데 발로 누르면 멜로디가 나오는 거나, 소리치면 반대쪽 깔때기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난감들에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프라 덕분에 엄청나게 웃었다.


기어코 안에를 들어가자며 데리고 가는데, 박물관 안에 성인이라고는 아이들의 부모님 밖에 없어서 너에게 딱 맞는 박물관이구나 하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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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로뇨는 타파스 투어 (타파스와 주류를 즐기고 다음 타파스바로 이동해 2,3차를 즐기는 것)로 유명한 도시였다. 오늘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리를 꽉 채웠다. 프라가 정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고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있다길래 거짓말하지 말라며 따라나섰더니 정말 말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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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여러 타파스 가게를 돌며 이 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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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파티 도시에 있던 행운으로.



KakaoTalk_20250323_121946248_19.jpg 나 저 무리랑 사진 찍고 싶은데.. 하니 프라가 따라와! 하면서 데리고 가 사진 찍은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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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는 정말 유명한 양송이 타파스, 오늘따라 통금 있는 로그로뇨 공립 알베르게가 야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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