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올 나의 시간을 슬기롭게 맞이하기

내 나이 쉰을 향해

by 균형

둘째 B의 1년 맞이 통장을 만들고 근처 커피숍에 들어와 아이스커피를 쪼르륵 한 모금 마시고 털썩 앉았어요. 아 덥다. 이렇게 더운 날에 둘째가 나왔군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1년이 지났어요. 돌맞이 가족사진도 찍고, 가족끼리 모여 식사도 함께 했어요. 통장까지 만들고 나니 이제 진짜 '돌끝맘'이 된 것이 실감이 나는군요. 야호. 더위를 한 김 식히고, 몸을 추슬러 주섬주섬 자세를 곧이 하고 앉아요. 아이를 처음 가졌을 때 연년생 둘째까지 계획하면서, 둘째를 돌까지만 키우고 나면 한결 수월하리라, 근거 없는 희망에 매달려 지난 시간을 견뎌왔어요. 육아라는 긴 여정, 첫 발자국 뗄 때 정해놓은 징검다리의 돌 하나를 디뎌 내었군요. 이제 제가 디뎌야 할 다음 돌은 어디일까요. 그보다 그다음 발자국을 위해 제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은 어디인 걸까요.


아이의 존재가 지금은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큰 이불처럼 느껴져요. 예상컨대 지금은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고 아이라는 두터운 이불속에서 더위를 견뎌내느라 바둥대는 중이군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겠지요. 아이들의 이불에 익숙해져 제 체온을 스스로 유지하는 법을 혹시나 까먹게 되었을 때에 이 녀석들이 이불을 걷어가 버리면 어쩌죠. 오들오들 떨면서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쏘아붙이게 될 지도요. 아니, 아니죠. 저들의 이불을 걷어내어도 몸소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말 추운 겨울이 되어 누군가의 이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때에는 반드시 남편이라는 이불을 덮을래요. 남편의 이불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내가 그의 이불이 되어주기도 하며 그와 털 맞대고 오순도순 살아야지요. 저희 아이들도 언젠가 이불을 서로 덮고 덮어줄 누군가를 만나겠지요. 녀석들이 언제든 이불을 걷어 다른 이에게 덮어줄 수 있도록 제 체온은 손수 지켜야겠어요.


벌써부터 무서운 단어 '사춘기', 아이들이 이 시기에 다다를 때 아마 저는 쉰 즈음이 될 거예요. 아이들이 이불을 걷어내리라 예상되는 시기이지요. 그래서 저는 제 나이 쉰을 준비할 각오를 단단히 해요. 아이들이 독립하겠다고 뜻을 내비칠 때에 저도 그들에게서 독립할 거예요. 저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날 때에 저는 제 삶을 살고 있으려고요. 제 삶 없이, 아이들의 사춘기에 상처받으며 '내 삶은 너였어'라고 아이에게 절대 무심코라도 내뱉지 않을 거예요. '내 삶은 네가 아니라 나였어. 내 이름 석자 '최이연'의 삶에 너희들이 잠시라도 둥지 틀고 함께 해주어서 엄마는 참 좋았어.'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나네요. 그래, 엄마의 삶에 너희들이 있어서 너무나 좋았어. 와주어서 너무나 고마워.


아직 30대, 뭘 벌써부터 50을 생각하니 할 수도 있지만 저 다짐은 진심이에요. 매 순간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결의를 다지는 건 아이들과 더 오래 행복하고 싶어서일 거예요. 저는 일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에요. 일 할 때는 4월과 11월을 제일 좋아해요. 4월과 11월에는 휴일이 없거든요. 물론 저도 휴일을 찾아 헤매는 별 다를 바 없는 직장인이지만, 막상 일할 때는 흐름이 끊기지 않는 휴일 없는 때가 집중력을 높일 수 있더라고요. 이런 제가 육아로 일을 멈추게 되면서 겪는 혼란이 조금은 예상되시는지요. 그러니 네가 말하는 네 삶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우선은 나의 일을 놓지 않는 삶이에요. 돈을 벌기 위해서든, 자기 계발을 위해서든 대한민국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사회가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를 자처하여 기꺼이 살 거예요.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놓고 싶지 않아요. 그래 봐야 회사원, 멋지지 않을 수도 있죠. 그래도 어디서든 열심히 살아내는 모습을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제 아이들이 최고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래도 항상 최선을 다 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소망해요. 말로 백번 해봐야 잔소리로 느껴지기밖에 더 하겠어요. 제가 스스로 묵묵히 제 자리에서 최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낸다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한 가지, 살아가며 소소하게 느끼는 단상들을 기록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너와의 기억, 그와의 기억, 아무개의 한 인간이 궁리하며 알게 된 것들 등등을 기록하며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은유. 2015. 글쓰기의 최전선. 메멘토)'가 되겠다고 결심해요. 이 자잘한 삶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닿아 그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위로까지는 아니어도 그저 눈꺼풀 잠시 흔들릴 정도의 공감이라도 얻을 수 있어도 만족할 것 같아요. 나중에 아이들이 공부할 때 옆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엄마의 모습으로 앉아 있고 싶어요. 공부하라는 잔소리 대신 엉덩이 붙이고 옆에 앉아있는 거죠. 너는 공부해라, 나는 떡을 썰 테니. 떡 대신 글을 쓰며 함께 하는 거예요. 아, 그냥 옆에 있는 게 불편하려나요. 아, 혼자 있고 싶어 할 거라고요..


하늘의 뜻을 깨닫게 된다는 지천명, 그때쯤이면 정말 하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가끔은(?) 아이라는 이불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너무 좋아요. '엄마~' 하고 웃으며 달려오는 녀석들을 보면서 '행복은 이런 거구나'하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생각을 저도 하고 있더라니까요 글쎄. 이럴 때는 하늘의 뜻이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이들을 통해 겪어보지 못한 행복감, 이 사소한 행복을 보고 느끼는 것,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밝고 환하게 웃는 것, 소소한 나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 어쩌면 이 뿐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아이의 존재 자체가 하늘의 뜻이려나요. 나의 부족함을 마구마구 들춰내어 겸손하게 살라는 신의 뜻일까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싶으면서도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시간이 조금 있으니 열심히 궁리하면서 가 볼게요. 아름다운 내 나이 쉰을 향해서 말이에요. 쉰이 부족하다면 내 나이 예순, 칠순을 향해 말이죠. 그래요 맞아, 아름다운 것이 어디 쉰 뿐이겠어요? 우리에게는 모든 나이가 다 멋져요. 그러니 너무 겁먹지 않고 걸어가 볼게요.


어느새 아이스커피의 얼음이 다 녹았어요. 이제 집에 가야죠. 끙차. 가서 이불 폭 덮고 아이들과 까꿍 놀이를 할래요. 매일같이 몇 번을 해도 아이들이 질려하지 않는 그 놀이 말이에요. J야, B야, 엄마 왔다. 까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