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란 면옥>과 평양냉면
먹으면서 얻는 행복 / 전체 행복
먹는 행복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 꽤 많은 이들에게, 매우 클 것이라 생각한다.
내 행복의 큰 부분은 음식이 차지하고 있다. 하루하루 오늘 꼭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하며 일 하고 걷고 생각한다. 그 음식을 먹으면서, 또 먹고 나서는 입으로 "아, 너무 행복하다."고 꺼낼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다. 다른 애정표현이나 감정 표현에 박한 편임을 감안한다면 매우 후한 표현이다. 그리고 '맛있다'는 오히려 표현하기가 더 애매해서 '좋다'로 더 표현을 많이 하곤 한다. 이는 오로지 미식만을 생각하는 것보다 '일련의 경험', 즉 식경험에서 얻는 만족감이 내게는 더 크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때로는 중국음식, 때로는 해장국, 갈비탕, 찌개. 백반. 한식 중식 일식 모두 안 가리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지만 그 중 일식을 제일 좋아한다. 식경험을 가장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밥을 먹었다면 후식은 꼭 먹는다. 보통은 국밥 후 케이크 코스에 가장 기쁘다. 먹는 것에만 즐거움이 있지 만드는 즐거움은 생각도 않았는데 요 근래 들어서는 마음이 가는 청년이(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요리를 참 좋아하고 또 요리사를 생각해볼만큼 요리를 잘한다하니 나도 해보려다가 괜히 음식을 망쳐놓기 일쑤다. 이렇듯 온종일 먹을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생각하며 산다.
누구나 다, 먹으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이 매거진에 기록을 해보려 한다. 고민하지 않고 제목을 <무심히 보다가 먹고 싶어지는 것들>로 적었는데 더 멋있게 만들걸 그랬나 싶다가도 무심한 듯 하다 행복해지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잘 지은 것 같다. 이러다가저러다가 먹은 음식, 드리마 혹은 영화 보다가 먹고 싶어진 음식, 작은 추억이 있는 음식 등을 찬찬히 오래도록 소개하고 싶다.
그 처음은 드라마 옥란면옥 (2018)을 보며 쓴 평양 냉면 이야기이다.
소울 푸드라 말하는 몇 가지 음식들이 있다. 앞으로 살아가며 경험을 더 해가며 더욱 그 리스트가 풍성해질 것이라 기대하는 리스트인데 평양냉면은 정말이지 빠질 수가 없다. 어렸을 때 먹었던 밍밍한 고깃국물로 시작했던 냉면을 스물이 넘자 그렇게 찾아다니며 먹었다. 자극적인 것을 잘 못 받아들이는 입맛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식초나 양념장을 넣어 먹는 함흥식 냉면의 짜릿함은 어쩐지 내 것이 아니었으나 평양냉면의 그 밍숭맹숭한 국물은 들이킬수록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도통 자극적이고 지나치게 차고 뜨거운 음식들은 적응을 못하는데 한겨울에 먹는 평양냉면이 제일 좋은 것 보면 정말이지 신기한 노릇이다.
내가 평양냉면을 표현한다면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라 할 것 같다. 그 맑고 차가운 국물이 내가 유일하게 잘 넘기는 찬 음식이다. 두 손으로 냉면그릇을 쥐어 들고 두어 번 꼴깍꼴깍 목넘김하면 졸졸졸 깨끗한 시냇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는 것 같다. 추석 때 방영된 <옥란면옥>이 주는 그 촌스러우면서도 청량한 깨끗함은 청량함은 내가 평양냉면에 가지는 이미지를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다. 게다가 평양냉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극이 너무나 재미있으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70년 동안 평양냉면 외길 인생을 살아온 아흔이 다된 아버지 달재와 냉면에서 벗어나 서울로 뜨고 싶은 마흔이 다된 노총각 아들 봉길의 부자전쟁을 그린 코믹휴먼드라마 _ 작품 소개
간략한 작품 소개 부분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장면이나 인물에 대해 천천히 적어가고 있는 있는 매거진 <영화로운 나날>에 넣을 지 여기에 넣을지 고민이 많이 되는 드라마 <옥란면옥> '평양냉면'이라는 치트키가 등장했으니 이 곳에 적어본다.
덧) 이 작품이 방심위 선정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극은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영란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한다. 봉길은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아흔 다 된 아버지 시중을 들며 오래된 냉면 가게를 꾸려간다. 인정받지도 못하고 호되게 욕 먹으며 말이다.
그에게는 자신을 매몰차게 떠나버린 수진이라는 옛 연인이 있다. 혹여나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간 친구의 세 번 째 결혼식 축하 자리에 향수까지 뿌리고 갔으나 그녀는 없었다. 그 곳에는 모르는 여인 영란이 있을 뿐이었다. 정의감이 아닌 다만 기분이 나빠 그녀에게 추근덕대는 친구 녀석을 흠씬 두둘겨주고 집에 들어가려니 숙식 제공이 되는 일자리를 찾아온 영란이 그를 붙잡는다.
북에서 온 그녀의 손맛을 알아본 달재는 냉큼 그녀를 주방에 들인다. 졸지에 주방에서 밀려난 봉길은 짝도 없고 아버지 수발은 들어야 하는 노총각 신세를 한탄한다.
과거 달재가 풍으로 쓰러지자 결혼을 약속했던 수진은 말도 없이 돌연 떠난다. 그의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떠난다는 그녀. 아버지 때문에 사랑하는 수진이를 잃고 그 때부터는아버지를 데려가라며 아침 기도를 하는 봉길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애증의 관계로 살아가던 그는 졸지에 방마저 혼자 쓸 수 없게 된다.
* 한소희 배우에 대해서는 출연하는 작품을 한 작품만 더 보면 글로 남겨보고 싶다. 살갑지 않은 얼굴이 오히려 잘 어울리는 예쁜 배우이다.
달재에게는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옥란이라는 소녀가 있었다. 지조 있게 그녀를 기다리는 달재. 재개발에도 적극적 반대하고 나선다. 옥란이를 여기서 기다릴 것이라고 말이다.
봉길은 영란에게 툴툴거리면서도 맑고 의리있는 그녀를 보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비밀이 지나치게 많은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잘 때 양말도 못 벗고 가끔은 악몽을 꾸며. 방에 커튼 하나 달아 놓고 지내는 둘이라 코 고는 소리 앓는 소리 가릴 것 없이 다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면'(다른 글을 쓸 때 사용한 개념)이 많아지고 넓어질수록 인물 간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재개발을 막아서는 달재 아버지는 개발을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였다. 강제 진행을 하러 와서 봉변을 당할 뻔 한 상황을 듣고 달려오는 봉길.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는 사내에게 따귀를 시원하게 날리는 영란의 깡, 그리고 치료를 해주는 섬세한 손길.
봉길은 반할 수밖에.
이 작품에서 이설 배우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영란 역에 더할 나위 없었던, 제 격이었던 배우라 생각이 든다. 1993년생 신예 배우인데 신하균 배우와 <나쁜형사>에서도 합을 맞춘다고 한다. 여러 군데에서 활용될 수 있는 인물인지 궁금한데 더 지켜보아야겠다.
2화
사연이 있는 영란. 떠나는 줄 알았는데 월급을 받아 누군가에 전하는 길이었다.
또 자기를 떠나버릴까봐 자전거를 타고 그녀를 데리러 온 봉길.
엄마도 그를 떠났고, 수진도 그를 떠났으니 달재에게는 누군가가 떠나고 남겨지는 트라우마가 남았을 것이다.
그녀가 떠나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더욱 가까워지는 둘.
가는 곳마다 그녀가 보이는 상상까지.
그 와중에 '오빠'라는 개인의 취향까지 반영한 재기발랄한 상상이었다.
그 즈음, 서로 좋아하는 것 같아 짝을 맺어주고 싶다가도 가는 옥락의 모습을 묘하게 빼다 박은 것이 신경 쓰이는 달재. 아버지의 인생을 그대로 이어 받아 기다리는 삶을 살까, 자식 걱정이다.
옥란도 그가 좋다. 자기 상황이 있으니 아니라고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쫓기고, 또 본인이 싫다고 하는 줄 알고 속 좁은 오해를 한 달재와의 감정도 정리되고
커튼을 치우고 다정히 잠든 둘.
이제 행복해졌다 싶으니 찾아온 옛 연인 수진.
난 진짜 모르겠다. 평양냉면 무슨 맛으로 먹는지, 꼭, 비온 다음 날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같은 게 나, 국물에서.
평양 냉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걸레 빤 물' 같다는 말을 했던 것이 별안 떠오른다.
오빤 이 동네 좋아해, 그리고 잘 어울려. 촌스럽고, 정감가는 게.
다시 찾아와서 사랑에 훼방을 놓는 역할이었다면 극 전체가 식상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통쾌하게 그런 분위기를 깨고, 이번에는 자기를 이용하고 버리라는 그녀. 봉길에게 남은 미안함을 그녀도 털어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한테 뭘 바란거야?"라고 쨍하게 던진 그녀의 말은 아마도 우리를 향한 것이었을 거다. '클리세'라 쉽게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우리들에게 말이다.
가게를 계속하려면 이 상황을 알려 가게를 유명하게 해야한다는 방송 작가가 된 수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영란을 설득한다.
영란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 조건으로 찍은 방송이었으나 그녀의 얼굴도 방영된다. 영란이 두려워 하던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녀는 탈북민이었고, 브로커에게 속아 팔려 갔다가 빠져나온 것이었다. 또 어머니와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도 얼굴이 알려져 자신을 쫓아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개발에 반대하다 쓰러지고, 영란은 '포주'와도 같은 이들에게 끌려가게 된다. 그녀를 빼오려면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 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가 지켜온 가게를 팔아야 했다.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가겐데......근데 아버지, 나도 영란이 지켜야 돼. 지켜준다고 약속했어. 내가 영란이 지키려면 아버지가 옥란이랑 했던 약속 깨야 하는데, 나 어떡하지.
영란이 데려오라는, 약속 꼭 지키라는 달재의 말이 그렇게 뜨겁게 목구멍을 찔렀다.
영 새로운 장면이 아님에도, 도깨비에서도 표현되었던 익숙한 장면이었음에도
이제야 봉길을 위해 붙잡고 있던 생을 놓고 평생을 기다려온 옥란에게 가는, 죽음의 길을 저렇게 깨끗하고 순수하게 표현해내었다.
극의 아주 후반부의 나레이션. 하나하나 짚어주는 영란의 나레이션이,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벌을 받으니 자신은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영란의 말이 사무쳤다. 봉길에게는 더욱 사무쳤을 것이다.
이설의 그 말간 얼굴과 김강우의 바보스러움이, 신구 님의 깔깔한 부정이 빚은 '식구애'가 잔잔하고 맑게 빛나는 작품이었다. 이설의 얼굴은 예의 그 첫사랑의 이미지가 아닌 평범한 우리 세상의 여성 얼굴이다. 더욱 작품과 시청자의 거리를 좁혀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옥란면옥에서 영란면옥으로 이어지는 세대의 이전과 원래 원래 있던 가족애보다 함께 노력해서 만든 '식구애'가 말갛게 빛나는 드라마였다. 각 배우들의 연기도 흠 잡을 데 없이 알찼다. 제 옷을 입은 배우들이 사각 프레임 안에서 신나게 노는 그 모습, 보다 많은 사람들이 꼭 보았으면 좋겠다 :)
그리고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서울 코스 중 하나, 대한극장에서 조조영화 본 후 평양 냉면을 먹는 코스를 따랐다. 이번에는 평양냉면 두 번째 입문하는 친구도 함께.
을지로와 충무로 그리고 광화문 일대는 노포들이 많다. 서울에서 사는 것이, 강북에서 자란 것이 자랑스러울 때는 역사가 흐르는 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흐른 역사를 지내오면 남아 전해지는 음식들을 어릴 적부터 맛보고 익숙해질 수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는 때.
자리를 오래 지킨 집에서 식사하는 그 시간은 내가 없던 그 시절을 잠시라도 들여다보는 기분을 준다. 혼자 조용히 과거고 현재고 미래고, 생각을 하게 한다. 좋은 음식은 행복감을 주고 오래된 공간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여름이면 상상도 못 했을 노-웨이팅.
졸졸졸 깨끗한 국물을 들고 마신다.
진짜 새해가 밝은 느낌이었다.
올 해 첫 냉면. 작은 일에 감사를 느끼게 한다. 이 한 그릇이.
금요일 늦은 퇴근 시간, 불현듯 떠오른 소울 푸드 평양 냉면.
<옥란면옥>의 바로 그 음식. 누군가의 추억이고 행복인 이 음식은 정말 따뜻한 한 그릇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맑고 깨끗한 국물에 대한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자 이제 나는 다음에 또 어느 집 냉면을 먹으러 가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