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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록 May 22. 2020

내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박정민의 얼굴

변산(2018)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게 된 후, 가장 먼저 지은 글이 이 글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고 딱 그때 이 영화를 봤었다. 그런데 이 글 업로드는 3번의 실패를 겪었다. 오랜동안 블로그 시스템에 익숙했던 탓인지, 혹은 모바일에서 자동 저장이나 복원이 안 되어 있는 특성을 나만 몰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편리함을 다른 플랫폼에서도 어이없게 기대했던 바보스러움이었기도 하고... 몇 줄을 할애하면서도 이 일을 기록하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3번은 너무 했다, 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이 영화 <변산>은 변산반도 그곳을 말하는 부안이다. 부안은 내 아버지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곳을 대하는 태도가 아버지에게서 딸로 내려왔는지 지방에서 산 적이 없는데도 그곳에서의 삶이 지리멸렬하다. 이제는 갈 일이 정말 없어진 그곳에서의 시간은 생각만도 지루하고 길다. 잠깐씩 들렀을 때 역시 한나절이 길고 길어서 자다 깨고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이 글의 큰 줄기는 박정민이라는 배우와 부안이라는 고향, 둘이다. 영화 보는 내내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박정민 배우이었을 것이며 부안이라는 곳이 주는 지리멸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생거()’ ‘살기 좋은 곳’ 또는 ‘살아서 좋은 곳’

영조대왕이 어사 박문수에게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인지 묻자 "사람 살기에는 부안이 최고입니다."라 답했다고 한다. 부안에 산과 들, 바다도 있고 소금, 생선, 인심이 후하여 집을 짓고 살만한 요건이 다 갖춰져 있고 이 곳에 집을 짓고 살면 재산을 금방 모은다는 말도 전해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의 <변산>과 내가 아는 그 변산은 그리 풍족하지 않다. '그 고향'은 폐항이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지 오래라 생기가 덜했던 곳이니 말이다. '생거부안'이나 이제 사람이 없으니 보여줄 건 노을뿐인 건 학수의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인 모양이다.


이제 <변산>에서 부안이 고향인 학수를 연기한 박정민 배우의 몇 마디를 보려 한다.

나쁜 버릇인데 칭찬을 들어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무섭기도 하다. 안심하면 안주하게 되니까 항상 나 자신에게 '안심하지 마, 들통나게 돼 있어'말한다.


'잘 되고 있구나'하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잘 되고 있다'는 걸 잘 못 느낀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한 스타일이기 때문.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의 이런 마음에 많은 이들이 "진짜 노력으로 올라온 멋진 배우인 것 같다", "불안해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어 주세요" 등 등의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자신에게는 '천상 배우'라고 할 만한 자질이 없어 남들보다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그가 '노력형 천재'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출간 작가이기도 한데 그의 카페에 가서 몇 권을 쌓아놓고 표현을 들여다보고 싶다. 갈수록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가득이다. 좋은 글을 쓰고 그것으로 좋은 기회를 얻어 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 없이 부럽다. 누가 그렇게 부러워진 적이 없는데 나는 요즘 부쩍 사춘기처럼 재능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 보인다. 


책은 삶 그 자체라고 시인 에이미 로엘이 말했다는데 책은 글로 이루어져 있으니 쓴다는 것은 삶을 꾸리는 것이고. 내가 잘 살아내려면 쓰는 일은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사랑합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 나쓰메 소세키의 말도 사무친다. 때때로 더 사무친다. 이 구절은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이종석이 이나영에게 마음을 전하는 장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좋은 인터뷰 기사를 보면, 혹은 어떤 영감을 주는 일화를 들으면 주절주절 말이 많아진다.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내 공간이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보고 듣고 먹고 즐긴 것들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만 온전한 감상을 조용히 적고 쓱 빠질 수 있는 이 공간이 참 좋다.


다시 한번, 박정민은 노력형 천재라고 한다.

쇼미더머니에서 6년째 떨어지는 학수(심뻑).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가고 싶어서 간다기보다, 인생이 걸린 시험에도 계속 낙방하는데 신경 쓰이게 오랜만에 인연 끊고 산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에 찝찝함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재능 있던 문학도 내려놓고 고향의 색 다 지우고, 고향 없는 서울 사람이자 고아로 뿌리를 숨기고 살아가던 그가 말이다.

어릴 적 상처 받았던 기억이 남은

지긋한 고향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본인의 첫사랑(장겨울 선생)과 본인을 첫사랑으로 간직한 선미(김고은)을 만나게 된다. 

어이없게 내려오게 된 고향에서 내 글을 훔친 원수와도 맞닥뜨리고 말이다. 

원수가 채간 나의 첫사랑도 마주하며.

본인은 고향에서의 피해만로 생각했겠지만, 유년 시절 자신이 아버지에게 상처 받았다는 이유로 화풀이로 괴롭히던 아이가 동네 폭력배로 나타난 것까지 보게 된다. 그리고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도 벌어지고.

안치홍 선생, 장겨울 선생 여기 있네.

곳곳에 지방 특유의 맥락 없는 왁자지껄함과 걸쭉한 욕이 나온다. 

나는 지금도 이 영화를 두 번 보며 그 욕에 흠뻑 빠져있다. 틈만 나면 두 글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정말 정신없게 이 건 무슨 영환가, 뭐라고 하는 건가 싶다가도 세세한 생각이 아닌 그냥 뭉텅이로 부안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됐다. 

지리멸렬하다 생각했던 그 고향에는 본인을 첫사랑으로 간직하고 문학에 뜻을 세워 결국엔 꽃을 피우는 선미가 있었고,

해결해야만 하는 묵은 인연도 있었다. 

묵은 마음을 걷어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하나하나 묵은 인연과의 감정을 정리해내고 보이는 노을이 그랬다. 

묵은 마음을 걷어내고 나니 보이는 마음들. 

이 영화가 큰 교훈이나 생각할 거리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고향이 없어도 아버지 고향의 한 조각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게도 있는 그 묵은 것들을 정리해야 비로소 보이는 노을이 있다는 것을. 


'노을 마니아'인 선미는 그렇게 학수의 노을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같기도 한, 부안 이야기 같으면서도 그저 우리 마음의 묵은 곳을 랩으로 노래한 <변산>이었다. 오글거리는 것을 떠나 거장 이준익의 새 시도에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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