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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록 Mar 21. 2020

가장 미시적인 기록이자, 판타지.

벌새(2018)

2019년 9월, 신촌의 한 대학교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비가 똑똑똑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맹렬히 퍼부어댔다. 그 바람에 교정을 벗어나지 못한 채 병원 1층 카페로 피해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편의점에도 우산이 동나 우산 없이 발이 묶이니 습기 찬 한숨만 뱉어대다가 나를 구하러 온 이와 함께 건너편 메가박스로 들어가 갑자기 보게 되었던 영화가 벌새이다.


25개 정도의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그 시기 극찬을 받던 영화였기에 궁금했고 독립 영화가 이루어낸 쾌거라기에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꼭 보겠다고 생각했던 영화를 너무나 드라마 같은 비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는 아주 놀랍게 시작했다.

똑 똑 똑, 엄마, 엄마, 엄마!


아이의 불안하고 공포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하마터면 이 영화 장르를 잘못 알고 들어왔다는 생각을 할 뻔했다.

그러나 곧 지나치게 평화로운 데다 살랑이는 분위기의 극보다 채도가 한 단계 낮아 더 우리네 일상과 같은 신들이 연속되었다.


1994년을 살아가는 한 가족이 나오고 이야기는 은희를 주축으로 해서 돌아간다. 삼 남매는 모두 학생이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는 1994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 은희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며 알게 된 것들은, 무서울 정도로 이제는 성인이 된 어른들의 유년기와 닮아 있다는 것.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실은 이 글을 쓰다가 글이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아 멈춰두었지만 발행 버튼을 누름으로써 맺음하고 싶었기에 주말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 나눴다. 나 혼자 맺지 못하겠으니 여럿이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였다. 그렇게 4월의 둘째 주 토요일에 잠실에서 모인 5명은 이 글 하나를 완성시키는 데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1.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봉준호가 기억한 기억한 마틴 스콜세지의 한마디이지요. 이 영화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고 전해오는 것 같습니다. 각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1994년은 어떤가요? (비슷한 예로 그 연도 자체로 기억되는 1987이 있겠네요)
2. 우스갯소리로 많이 나오는 '중2병'. '내가 싫어지는 때'라 영화 중 영지 선생님이 말하기도 하지요. 벌새를 통해 '거리두기' 하며 본 '중2' 그 시기에 대해 이야기 나눠 봅시다.
3. 아무렇지 않게 한 상대의 말이 오래 남은 경우, 혹은 나는 잊었으나 상대를 오래 힘들게 한 말이 있는 경우를 나눠 보아요.
4. '영지 선생님'같이 나를 따스하게 봐주던 사람이 있나요? 꼰대와 어른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아요.

최대한 생각하기를 미뤄 두었다가 늦은 밤 가까스로 해 본 4개의 질문들이었다.


가벼웠고 질문이 너무 많이 추리는 데 애를 먹었던 전의 발제들과는 달리 이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다른 모임원들과 나눌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다. 쉬이 질문을 정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모두 나누고 온 후의 말이지만,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은희 혹은 은희의 오빠, 아빠 그리고 엄마, 언니가 한 번 씩은 지났거나, 지나고 있던 것이다. 

은희, 지영이 그리고 서연이, 지안이.


이 작품의 제목은 <벌새>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한다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인 벌새이다. 아주 작아서 사소해 보이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은희를 말한 것 같다.


사실 제목을 은희로 바꿨어도 세련미는 떨어지나 맥이 통했을 것 같다. 곁다리로, <82년생 김지영> 등과 같이 여성의 이름을 눈에 띄게 한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선 일이 많아졌다는 것, 그리고 그 세대 여성들의 보편 정서가 있다는 것 아닐까.


은희는 그다음 10년에는 지영이가 되어 있었고 또 그다음 10년에는 서연이, 그리고 이제는 지안이가 되어 간다.  한국, 여성, 그리고 보편 정서를 관통하는 개인의 미시적 경험들로.


남성의 이름을 제목에 넣은 영화가 그 남성 혹은 그 남성 주변의 특수하고 특징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성의 이름을 한 영화들은 어떠한 보편 정서를 보여주는 데 힘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생각나는 영화로 다장 김창수 등의 위인과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남성 중심 코미디물이 있다.)

사정 있는 남자들


기본적으로 부유한 지역에서, 부단히 노동을 해야만 가세를 이어갈 수 있었던 떡집 딸 은희.


나는 강남에서 직장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테헤란로의 그 대단한 대로가 아니라 아래층에는 학원이 있고 위층에는 독서실이 '있던' 그런 주택가의 오래된 회색 건물이다. 은희네 떡집 같은 곳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에도 떡볶이 집이 있고 파리***가 있으며 세븐***이 있는 것처럼 '이 곳에도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런 평범한 공간. 바로 그런 집이 은희의 집이었나 보다. 노른자위를 부단한 노동으로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집, '강남' 두 글자를 간신히 잡고 있는 작은 회사처럼 말이다.


은희 가족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첫 째 수희에게는 관심이 조금 덜 갔을 뿐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는 하나같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가 묵묵히 일 할 때도 춤추러 나가, 아마도 부적절한 관계까지 만든 것 같은 아빠

텅 빈 얼굴을 한 채 언제나 별 말 없는 엄마

은희를 때리는 오빠


아주 역설적이고 당황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이었던 아빠와 오빠가 은희가 혹을 떼는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본인의 가족을 잃을 뻔했다는, 혹은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당혹감에는 여지없이 무너져내려 펑펑 우는 장면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꺼이꺼이 우는 아빠의 그 모습은 너무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문을 두드리던 첫 장면에 이어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감정적으로만 이해가 되었던 부분이기에 이 부분 이야기를 남성 모임원에게 들어보았다.


듣고 나니 '남자가 아니기에 몰랐던' 경험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갓 어린이가 된 순간부터 책임감이 심어졌던 것이다. 부모님 중 특히 아버지로부터 더 많이.

네가 내 다음 세대의 가장이다.
스무 살이 넘었으니 너도 이제 어른이다.
집안일에 관심을 가져라.
집안일을 챙겨라.

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작디작은 몸에도 마음에도 책임감과 부담감을 등에 지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쌓아가야 하는 책임감이 '외부에서 주입된 책임'이 되며 강제적인 무게감, 그러니까 부담감이 된 것이다.


종종 드라마에서 정말 어린 소년이 자기 엄마와 여동생을 지키겠다 말하는 것, 자기가 아빠 다음이라 으스대는 것을 보고 '쟤 웃기네'하고 지났던 일이 생각난다. 다시 그 어린 소년을 떠올리자 구겨지지 않고 부담감에 눌리지 않았던 그 예쁜 마음도, 은희의 시절을 거치고 가정 밖의 세계에 내던져지면서는 구겨지고 짓이겨지면서 변질되는 것이구나 싶어 졌다.


아주 어릴 적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무게는 갈수록 무거워지고 세계는 갈수록 복잡해진다. '내가 여자라서 몰랐던' 그리고 '겪지 않아 몰랐던' 일이었다. 남자가 '여자가 아니라서' 느낄 수 없던 일상적인 신변의 위협과 치안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회의 실질적 약자로서의 무기력감을 말이다. (이와 관련, 부분적으로 남성의 군대 경험이 스물 무렵의 억압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많이 간다. 다음에 조금 더 집중해서 언급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남자든 여자든 특정 시기를 지나 세상에 내동댕이쳐지기 마련이다. 아주 좁은 세계에서 사방이 예측 안 되는 타인과의 교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


은희 인생에 아빠와 오빠 외의 남자이자 그들과는 달리 어눌하고 부드러운 남자 친구는 계속해서 찾아온다. 자기가 버리고, 그리고서는 또 찾아온다. 그리고 그 집 엄마는 은희를 또 찾아온다. "쟤가 그 방앗간 집 딸이니?"에서 느껴지는 또 하나의 편견과 무시는 은희가 또 새로이 겪게 되는 세상의 무게이다. 하지만 이들, 중학교 2학년생이다.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시기였다.

중2, 누구나 지나오는 열다섯의 세계


친구에게 버림을 받으면 세계가 붕괴되는 듯한 생각이 드는 시기.

좋아한다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던 아이가 '그 건 저번 학기 일'이라며 휑 돌아서버리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계속 나의 '저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기어코 그때의 사람들을 지금 내 머릿속에서 지내게 한다.


상처 주는지도 모르고 상처를 주는 가해자인 동시에 또 누군가에게는 상처 받는,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김과 동시에 터지듯이 몰려오는 타자와의 교란은 그런 식으로 상대를 베고, 또 베인다.


이때 도덕관이 개입할 여지없다. 상대에게는 조심성 없고 나에게는 한 없이 예민한 자아 과잉이자 부주의한 아직은 어린아이들의 불완전한 상호작용이다.

은희에게는 완벽한 어른, 영지.


이 영화를 다큐에서 판타지로 만드는 김영지 선생님.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꼰대 아닌 어른이다.


영지 선생님은 '죽음으로서 은희를 확 성장까지 시키는 완벽한 존재'였다. 결국 한 단계 성장으로 승화까지 시키는 완벽한 판타지적 인물이다.


모르면서 넘겨짚어 말하지 않고 어린애가 하는 말을 자분히 앉아 차를 따라주며 들어준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쉬이 반말을 하지도 않는다. 은희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며 대했다. '만들어가고 있는' 한 자아를 존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은희가 겪는 아픔을 들여다봐준다. 그냥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것이 그것이다.


영지는 아마, 미래에서 온 은희일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생각해보니 내게도 그런 선생님이 계셨다. 담임교사가 아닌, 음 뒷방 교무실에 들어가신 퇴임을 얼마 앞두지 않으신 국어 선생님과 생물 선생님이셨다. 그분들의 한 마디를 지금까지 품고 있다. 사람을 넘어진 채로 두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잘 닦인 도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따스한 시선과 한 마디이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예뻐해 주고 좋아해 주는 그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다 큰 지금도 그렇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임에서 나온 경험담에, 교우 관계에 어려움을 겪은 아이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선생님의 말은 그 아이의 자아를 더욱 고립시켰다.

극은 은희에서 은희 엄마의 텅 빈 눈으로 이동한다.

어떻게 보면 은희의 미래가 엄마일 것 같기도 하고, 은희에게는 영지 선생님이 지나갔고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등의 외부적 충격과 아픔들을 치유해가며 다를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남겨 놓는다.

보편적이고 찬란한 우리들의 기억, <벌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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