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속편(Dear Enemy, 진 웹스터 )을 읽고
키다리 아저씨2 -그 후 이야기(Dear Enemy, 진 웹스터)를 읽고
키다리 아저씨라는 책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긴 어려운 책이지만..ㅎㅎ) 키다리 아저씨는 양장본이 아니어도 세계명작 시리즈로 초등학생용 문고판도 많고, 만화로 출판된 책도 있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술술 읽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명작과는 달리 대개는 본격적으로 접하는 시기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쯤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막 이성에 눈뜨게 되어 시도때도 없이 가슴이 콩닥콩닥하는 사춘기의 시작과 이 소설을 읽는 시기가 적절히 맞물리지 않나. 사춘기가 막 시작된 소녀들이 한 번쯤은 꿈꿔보는 비밀스러운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명작소설로 이만한게 없는 것 같다ㅎㅎ
이에 비해 속편인 키다리 아저씨2-그 후 이야기(Dear Enemy, 이하 '속편')는 원작의 명성과 유명세에 비해 그 존재가 잘 알려져있지 않은 모양이다. '속편이면 주디와 저비스씨가 결혼 이후 살아가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읽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예상했던 내용과 많이 달라서 추천을 잘 안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속편에 대한 리뷰나 홍보글조차도 많지 않은 듯 하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속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는데 사려는 결심을 하진 못했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책을 커서 다시 읽는다는게 뭔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더 강력한 이유는 엄마한테 괜히 사달라고 했다가 핀잔듣고 공부 안하고 다른 생각만한다고 잔소리 듣기 싫어서였을텐데.. 이젠 체크카드를 가진 어엿한 취준생..한량으로 성장했기에 생각난김에 기쁜마음으로 주문했다.
(스포일러 거의없음. 리뷰를 읽고 책을 읽어도 감상에 큰 지장이 있지 않을 듯 합니다.)
잘 알려져있지 않은 속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디와 저비스씨가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중 저비스씨는 주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존 그리어 고아원을 꿈꿔왔던대로 변신시킬 수 있는 자금을 준다. (키다리 아저씨 때에 비해서 주디에게 돈과 사랑을 쏟는 스케일이 훨씬 늘어나신 저비스씨. 그 때 신분을 감추느라 하고 싶은 만큼 못해주셔서 그러는 건가ㅎ)그리고 주디는 그 자금을 책임지고 집행할 고아원의 원장 자리에 대학시절 그녀의 가장 친한친구였던 샐리 맥브라이드를 앉히고자 한다. 따뜻하고 인정많은 품성을 갖춘 샐리이지만,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과 고생을 모르고 곱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이며 사회진출보다는 사교계, 그리고 약혼자와의 결혼에 더 관심이 많다. 샐리가 주디의 제안에 대한 거절의사를 밝히는 편지로 책이 시작되는데 역시 주디의 친구답게 첫 편지부터 솔직함과 신랄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일부를 인용하자면...
(중략)...정말이지 말도 안 돼. 두 사람 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게 아니면 혹시 아편에 중독되기라도 한 거니. 그래서 말도 안되는 환상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거니? 내가 100명의 고아가 있는 고아원 원장에 어울린다는 말은 내가 동물원 원장에 어울린다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야. (중략)
..대충 샐리가 앞으로 보낼 편지가 얼마나 매운맛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아무튼 샐리는 이렇게 완강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지만 그녀의 약혼자인 정치인 고든 할록이 샐리가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을 못미더워하고 우습게 여기자, 샐리는 오기가 생겨서 주디의 제안을 수락하고 존 그리어 고아원 원장으로 부임한다. 홧김에 오긴 왔는데 고아원 원장으로서 샐리가 처리해야 할 수 많은 문제들은 홧김에 대충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서 골치가 아프고 곧 후회가 물밀듯 밀려온다. 게다가 산적한 고아원 문제만큼이나 샐리에게 짜증나는 것은 고아원 원생들의 건강을 담당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로빈 맥래와의 갈등 이다. 저비스씨는 이 의사를 제법 좋게 보고 있어서 샐리를 고아원 원장 자리에 앉히려고 꼬실 때 '흥미로운 스코틀랜드 의사가 있다'며 은연중에 샐리에게 어필하기도 한다. 그러나 샐리와 이 의사는 거의 대척점에 가까운 인물이라 첫 만남부터 순탄치가 않다. 비유적으로는 '감성충만하고, 열의와 마음이 앞서는 문과형 인간 샐리'와 '사실과 자료에 근거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냉철한 이과형 인간 맥래 선생'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전통적인 남녀의 전형적인 특성과 진부한 문과, 이과형 인간.. 이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인 1910년대를 고려하면 틀에 박힌 고리타분한 비유가 어쩌면 더 적합하다고 본다.) 샐리가 맥레 선생을 처음 만나고 주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별로였는지 알 수 있다.
로빈 맥래 선생이 오늘 오후에 새 원장과 인사를 하려고 찾아 왔어. 다음에 맥래 선생이 뉴욕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 네 남편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네 눈으로 똑똑히 보기 바란다. 저비스씨는 내가 이곳 원장이 되면 제일 좋은 점이 세련되고 재치 있고 학식이 풍부하고 더불어 매력까지 넘치는 맥래 선생이라는 남자를 매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었지만 모두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중략) 그 사람하고 같이 있느니 차라리 바위하고 같이 있는 게 더 재미있겠어!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맥래 선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맥래 선생 역시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내가 경박하고 사리분별도 못해서 신뢰가 필요한 이런 자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더구나. 아마 지금쯤 저비스씨는 나를 당장 이 자리에서 내쫓아 주십사 하는 맥래 선생의 편지를 받았으리라고 장담해.
이 책의 영어 원제인 Dear Enemy도 샐리와 맥래 선생과 관련이 깊은 제목이다. 샐리가 맥래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의 대부분이 '적에게' 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샐리는 그 밖에도 다양한 별명을 만들어 이 의사선생을 놀려먹는다.) 이제까지 소개한 약혼자 고든 할록, 의사 로빈 맥래,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 이 세 사람에게 샐리가 보내는 편지로 속편은 구성되어 있다. 주디에게 보내는 편지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샐리가 고아원을 바꿔나가는 과정, 고아원 아이들과 직원들과의 생활, 샐리의 일상생활과 느낌(주로 하소연, 뒷담화) 등을 샐리가 후원자 펜들턴 부인이 아닌 친구 주디에게 진솔하게 전달한다. 약혼자 고든과 고아원을 같이 이끌어가는 동반자인 의사 선생에게도 쓰는 편지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샐리의 감정변화와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또 쏠쏠한 재미이다. 이 밖에도 샐리가 받는 사람을 일컫는 호칭, 받는 사람에 따라 자기 자신을 칭하는 호칭, 상황과 사람에 따라 휙휙 변하는 솔직한 문체와 말투(요컨대 주디에게는 친근한 반말을, 맥래 선생에게는 비꼼을 가득 섞은 존댓말을 사용하는 등) 등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사소한 재미가 여전하다.
두 편을 연달아 다 읽긴 했지만 현재 내 취향으로는 속편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데.. 사실 키다리 아저씨에게는 공평하지 않은 싸움이다. 너무 많이 봐서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한 1편과 이제 처음 읽는 속편 중에서 당연히 속편이 재미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점을 제쳐두고도 앞으로는 속편을 더 많이 찾을 것 같은 느낌인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전편에 비해 다양한 인물들과 편지를 주고 받아서 내용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키다리 아저씨에서는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만 편지를 보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주디의 성장과 알게 모르게 저비스 씨가 주디에게 빠져드는 모습이 주로 부각되는 매력이었지만, 그 이외의 주변의 심층적인 인간관계나 사회상까지는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주디가 속한 환경인 여대와 여대 기숙사도 한 몫하는데 솔직히 대학생의 생활이 변화무쌍할 수 가 없다. 그 속에서 소소한 이벤트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는 규칙대로 단조롭게 흘러가는 것이 대학생활이다. 그러나 샐리가 고아원을 개혁해 나가는 과정이 주 무대인 속편에서는 샐리가 원장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아이들과 고아원의 상황 때문에 소재가 더 풍부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배경도 대학에서 존 그리어 고아원이 속한 마을로 넓어졌고, 샐리의 러브라인도 삼각관계의 형태로 흘러가기 때문에 전편보다는 인간관계의 흐름과 사회의 모습이 더 역동적이라서 성인이 된 나에게는 그나마 좀 더 현실적인 재미를 주는 듯 하다.
속편이 더 좋은 두 번째 이유는 비꼼과 유머, 재치가 가득한 샐리의 편지 내용이 더 내 취향이기 때문이다. 주디의 대학생다운 통통 튀는 발랄한 느낌의 편지 내용이 전편에서 독자들을 작품에 빠져들게 했다면, 속편의 샐리는 낯설고 불만족스러운 환경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좀 더 빈정거리고 비꼬는 유머 등이 주디와는 다른 결의 재치로 나타나는 듯 하다. 샐리의 편지가 그렇다과 블랙 유머로 가득하다거나 매사 투덜거림으로 가득한 것은 절대 아니다. 점차 자신의 계획대로 바뀌어가는 고아원과 아이들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서 열의를 보이는 모습을 보면 역시 주디의 친구답다는 생각도 든다. 여담이지만 김치로 비유했을 때, 주디의 편지는 '그냥 배추김치인데 어쩌다가 사래들리면 매워서 얼얼한 정도'라면 샐리의 편지는 '매운 고춧가루로 담근 톡 쏘는 갓 김치'같다. 어디까지 내 생각이지만.
어렸을 때 속편을 봤으면 오히려 재미없게 읽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때 키다리 아저씨에 관한 최고 관심사는 "과연 주디와 저비스씨는 어떻게 살까? 결혼해서도 알콩달콩 예쁘게 잘 살고 있을까?" 인데 그러한 내용은 샐리의 편지를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봤으면 주디와 저비스씨의 러브스토리가 별로 없다는 실망감 때문에 샐리의 고아원 개혁기를 지금처럼 흥미진진하게 보지 못했을 것 같다. 고아원을 탈바꿈시키는 과정중에 샐리의 아동관, 교육관, 삶에 대한 가치관 등이 종종 언급되는데 이것이 교육을 전공한 나에게 시사해 주는 바도 컸다. (원래 이 글에서 언급할 계획이었지만 내용이 길어져 또 다른 글로 풀어보고자 한다.) 다만, 작품이 쓰여진 시기 때문에 나타난 어쩔 수 없는 비판점도 있는데 바로 고아원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지고, 맥래 선생이 샐리에게 설명하는 내용 중에 우생학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인권 존중에 어긋나는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현대의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에서 나오는 불쾌함은 시대적 한계임을 감안하고 볼 수 밖에 없겠다. 그래도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자란 소녀가 커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시점에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는 샐리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긴 했다. 키다리 아저씨를 재미있게 읽었던 분이라면 분명 반가울 소중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