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설날 아침, 창문을 열자마자 눈부시게 펼쳐진 하얀 세상이 나를 반긴다. 2025년의 첫눈이 아니지만, 설날 아침의 눈은 언제나 특별한 느낌을 준다.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과 함께, 하얀 눈이 덮인 세상은 마치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게 만든다. 차가운 공기가 볼을 스치지만, 마음속은 설레고 따뜻하다.
어릴 적 기억 속의 설날 아침도 이렇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장롱 속에서 가장 따뜻한 옷을 꺼내 입고, 마당으로 뛰어나가 하얀 눈을 밟았던 그 순간. 발밑에서 들려오던 뽀드득거리는 소리는 세상이 깨끗해진다는 신호처럼 들렸다. 그리고 가족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며 설날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설날 아침이면 집 안에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부엌에서 따뜻한 떡국을 끓이며 한 해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신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국 냄비 위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마치 한 해의 희망을 상징하는 듯 따뜻하고 평화롭다. 떡국을 한 숟갈 뜨면, 하얀 국물 속에 담긴 조각들이 마치 새해의 소망처럼 반짝인다.
한 해 동안 건강하라는 의미로 한 그릇 가득 담긴 떡국을 먹으며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2024년 한 해 동안 겪었던 일들, 새로운 2025년에 대한 기대와 바람, 그리고 설날을 맞이한 감회까지.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설날 아침에는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세배를 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히 절을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가 오고 가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세배를 마친 후 어른들이 건네주는 세뱃돈은 단순한 용돈이 아니라, 새로운 한 해를 잘 살아가라는 응원과 격려가 담겨 있다.
설날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은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아이들은 쌓인 눈을 보며 밖으로 뛰어나간다. 마당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손끝이 얼어붙을 정도로 장난을 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와 난롯가에 앉아 손을 녹인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에서 가족들이 함께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은 설날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다.
설날 오후가 되면 가족들은 함께 성묘를 가기도 한다. 조상님들의 묘를 찾아가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정성스럽게 절을 올린다. 하얀 눈이 덮인 묘역은 마치 조용한 경건함을 더해 주는 듯하다. 조상님들 앞에서 마음속 깊은 곳의 소원을 빌고, 가족들과 함께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시간은 설날이 주는 또 하나의 의미 깊은 순간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설날의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윷놀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윷을 던지며 환호성을 지른다. “도야! 개야!” 하며 웃고 떠드는 사이, 세상의 시름과 걱정은 잠시 잊힌다. 어린 시절에는 단순한 놀이였던 윷놀이가, 나이가 들수록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설날 저녁이 되면, 눈이 내린 마을을 한 바퀴 걸어 본다. 낮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만든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찍혀 있지만, 여전히 길 위에는 하얀 눈이 부드럽게 덮여 있다.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눈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차분해진다. 겨울의 고요함 속에서 새해의 시작을 차분히 되새기는 시간이다.
눈이 내린 설날 밤,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새해에 대한 다짐을 한다. 눈이 모든 것을 깨끗이 덮듯이, 나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일에 얽매이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날의 눈은 조용히 가르쳐 준다.
그렇게 2025년의 눈 내린 설날은 저물어 간다. 하루 동안 가족들과 함께 나눈 웃음, 이야기, 따뜻한 떡국 한 그릇, 그리고 하얀 눈 위에 남긴 발자국들. 모든 순간들이 새해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설날이 찾아오더라도, 눈이 내린 이 날의 기억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설날은 단순히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다시금 떠올리고,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날이다. 그리고 눈이 내려 모든 것을 새롭게 덮어 주는 것처럼, 우리 역시 다시 한 번 희망을 품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