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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남기는 흔적

시간

by 우보천리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시간이라는 개념은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해가 저물면 잠드는’ 정도로 단순하고 선명하게 그려지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간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점차 흐릿해졌다. 달력 위의 날들은 늘어났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은 어느새 기억 너머로 희미하게 흘러가 버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남겨지는 나의 흔적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문득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 답을 찾고자 마음 깊이 천천히 귀를 기울이며, 지나온 길 위에 놓아둔 나의 흔적과 내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지의 미래가 서로 이어지는 경계선은 한 자락의 바람처럼 연약하고도 경이롭다.

때로는 사진첩을 뒤적이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실감하곤 한다. 그 작은 네모 속엔 생기 넘치던 내 유년 시절의 표정, 한창 꿈을 키우던 청춘의 순간, 그리고 마치 어제인 듯 느껴지지만 이미 오래전이 되어버린 가족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이라는 것이 신기한 것은, 그 한 장 속에 담긴 표정이며 풍경이며 공기마저도 머무르게 만든다는 점이다. 마치 시간이 그 안에서만 멈춰 서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 순간이 이미 과거라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사진 밖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고, 누군가는 더 이상 그곳에 없으며, 내가 사랑하던 풍경도 이젠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을지 모른다.

가끔은 내 발자국이 찍힌 길을 되짚어보기도 한다. 과거에는 무언가 특별해 보이지 않았던 길도, 막상 다시 걸어보면 어느새 달라진 풍경과 함께 나 자신마저 변한 것을 깨닫는다. 첫사랑의 아련함이 서려 있던 골목길,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밤새도록 떠들었던 공원 벤치, 부모님과 단란한 대화를 나누던 마루 끝 등. 그 모든 곳에서 나는 한 시절을 살았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렇게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그려간다. 그 과정에서 남는 흔적은 때론 아프고 때론 아름답다. 그리고 그 흔적이 어느 날 불현듯 나를 지금 이 자리로 불러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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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오래전 들었던 노래 한 곡에 갑작스레 가슴이 찡해지는 순간이 잦아진다. 그 멜로디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 그 시절 함께하던 사람들, 그리고 내 마음속 가득했던 젊음의 희망 같은 것들이 물밀 듯이 떠오른다. 그때는 지금처럼 무거운 책임이나 복잡한 고민 따위가 세상을 채우지 않았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투정을 부리던 시절. 태양이 지고 나면 또다시 아침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순수함.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던 아이 같았다. 세상을 다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고, 거칠고 억센 바람에 조금씩 닳아갔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계기로 예전의 그 희망이나 열정이 다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 때면, ‘아, 나도 분명히 저렇게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지’라며 혼잣말을 하곤 한다.

비 오는 날 창문 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란 것이 한없이 부드럽고도 냉정하게 흐른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작은 물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가다가 아래쪽으로 스며들 듯, 우리의 기억도 마찬가지로 마음 어느 한구석으로 스며들어 가버린다. 때론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느닷없이 다시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오래 간직되진 못한다. 마치 흐르는 물 위에 띄운 종잇조각처럼, 시간이 흘러가면 그 조각은 어느새 흔적을 감춘다. 그래도 그 조각이 어딘가를 떠돌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연이나 추억이란 것은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전에 살던 집 마당에는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시던 꽃들이 가득했다. 봄이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피어났고, 여름이면 연두빛 잎사귀가 싱그러움의 향연을 펼쳤다. 한낮의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꽃들이 활짝 필 때면, 할머니가 손수 가꾼 그 정원이 왠지 조금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그 모습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싶어 매일같이 달려 나가 사진으로 남기곤 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들른 그곳은 물론 꽃이 피어 있긴 했으나, 이미 할머니는 더 이상 거기에 안 계셨다.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볼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묘한 공허함이 스며들었다. ‘여기에도 분명 내 발자국이 남아 있을 텐데.’ 나는 그렇게 옛 정원을 서성이는 내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간의 흐름에서 비롯되는 변화란, 때로 잔잔하고 때론 폭풍처럼 거세다. 오늘 내가 바라본 거울 속 내 모습도, 내일은 조금씩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적응할 틈도 없이 순간순간이 흘러가 버려, 숨 한번 돌릴 새 없이 과거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기에 우리는 더욱 내일을 기약하고, 과거를 미화하거나 후회하며, 현재를 소중히 여기려 애쓴다. 아무리 단단한 돌덩이도 세월 앞에서는 조금씩 깎여 나가고, 아무리 흐물흐물한 마음이라도 시간 속에서 단단해질 수 있다는 점이 삶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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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남기는 모든 흔적이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쉴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했던 말 한 마디, 작은 도움의 손길, 혹은 따뜻한 눈맞춤 하나가 시간이 흘러도 깊은 위로로 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사소해 보이지만,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 어쩌면 더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을 때가 있다. 마치 마음속의 상자 하나를 열면, 그 안에서 빛과도 같은 추억이 흘러나오는 느낌.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는 바로 그런 작은 순간의 진심어린 교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겨울날, 길을 나서다가 눈 쌓인 골목 어귀에서 나를 알아본 한 아이가 내게 달려와 반갑게 인사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 아이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아이는 “예전에 저한테 과자랑 우유 주셨잖아요!” 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때서야 아, 몇 해 전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어떤 아이였구나 싶었다. 나는 한 번의 사소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에게는 뜻밖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작은 흔적이 그 아이의 마음에 좋게 남았다면, 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산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며, 그 모든 것이 조합되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해 간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너무 결과만을 중시하거나 빨리 답을 찾으려 하다 보니, 정작 그 과정을 놓쳐버리곤 한다. ‘과연 내가 남기는 흔적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마찬가지다. 그 흔적이 대단하거나 화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일상 속 작은 행동, 작은 미소, 작은 배려가 모여 결국 긴 시간을 넘어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바쁜 일상에서도 잠시 멈춰 선 채,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된 행동은 무엇일까?’ 하고 스스로 물어본다면, 그 하나하나가 분명 소중한 흔적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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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 언제부턴가 예전처럼 다정한 말씀을 자주 건네지 못할 때, 친구와 사소한 오해로 다투고 한동안 서먹해졌을 때, 혹은 혼자서 많은 것을 견디다가 문득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 흔적들이 어디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현재의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주는 의미를 더 깊이 음미하게 되고, 고맙거나 미안했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뻐근해진다. 그러나 바로 그 아쉬움과 미련마저도 언젠가는 또 하나의 흔적이 되어 다가온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 각자의 삶에 물결치듯 스며들며,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새겨 놓는다.

어떤 날은 시계를 응시하며 “아직도 시간이 이렇게 많이 남았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날은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어?” 하고 놀랄 때도 있다. 시간은 무정하게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감정에 따라 길게도 짧게도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괴로운 일을 겪을 때는 한없이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그 차이 속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 설렘과 두려움 등을 경험하며 삶을 배워간다.

가끔 한적한 오후,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면, 저 넓은 구름 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상상하곤 한다. 구름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하늘을 떠다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그란 모습을 하고 있던 구름이 어느새 길쭉하게 늘어지거나, 작게 조각나 다른 구름에게 흡수되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도 어쩌면 저 구름처럼 계속해서 변하고 섞이며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리라. 조금씩 흩어지고 섞이는 과정 속에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낳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꿈꾼다. 그렇게 생각하면 ‘변한다는 것’이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닌,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순환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종종 인생이 한 번뿐이라 말한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조금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새롭게 살아가며, 어제의 내가 남긴 흔적을 이어받아 오늘의 나를 빚어내고, 또 내일의 나를 향해 움직인다. 즉, 매일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파편 같은 기억들이 쌓여 최종적으로 ‘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존재가 수없이 많은 시간의 층위를 건너 매 순간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인생의 진짜 재미이자 신비로움이 아닐까.

여러 세대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아주 오래전에 쓰였던 책을 꺼내 보면 종이 끝자락이 누렇게 바래 있다. 누군가 그 책을 읽으며 흘렸을 눈물 자국이나, 밑줄 친 문장 같은 것들은 그대로 남아 ‘과거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그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 너머의 낯선 사람과 조용히 연결된 기분이 든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혹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같은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그렇게 한 권의 책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공유하며, 알 수 없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외롭고 힘든 순간이 찾아와도,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도 분명 똑같이 힘들었거나 외로웠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결국 견뎌내 지금의 내가 된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날들도 언젠가는 지난 추억으로 머물 거라는 사실에 작은 용기를 얻기도 한다. 어느 하루도 그냥 무심히 흘러가지 않고, 그날의 하늘과 바람, 내 숨결과 감정은 고스란히 내 안에 새로운 흔적을 남긴다. 비록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는 분명 선명한 자국을 만들어 간다.

어쩌면 우리가 남기는 흔적들 중에는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들도 있고, 오래오래 빛을 발하거나 간직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꽃향기가 오랜 시간 방에 남아 있진 않아도, 그 꽃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설렘, 따뜻한 온기만큼은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 또 말로 전하지 못했던 감사와 사랑의 감정은 여러 모양으로 모습을 바꿔 누군가의 추억이 되곤 한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 누군가가 내가 남긴 흔적을 다시 발견하고, ‘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걸로 내가 살아온 시간은 충분히 의미를 지닐 것 같다.

바람이 지나간 뒤의 나뭇잎이 가볍게 흔들리듯, 우리가 걸어온 길에도 늘 파문이 일어난다. 크고 작은 파문들은 서로 섞이고 흔들리며, 결국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 소리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며,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얻는다. 거창한 철학이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도, 매일의 일상 안에서 시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조금의 울림을 남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흔적이 될 것이다.

긴 인생길을 어느 정도 걸어오고 보니, 때로는 돌아서 간 길이 더 아름답게 기억될 때가 있고, 때로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값진 깨달음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남기는 흔적이란, 단순히 발자국이나 눈에 보이는 기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내가 살아온 모든 이야기이며, 내가 품었던 모든 감정이자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작은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눈물겨운 순간까지도 귀중한 흔적으로 남고, 평범했던 하루가 시간이 지난 뒤엔 기적 같은 기억이 되어 우리를 감싸준다.

그렇기에 오늘 이 순간에도, 나는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으려 한다.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어떤 표정을 짓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매일 조금씩 변하고 흔들리는 시간 속에서도, 나는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순간을 나누려 애쓴다. 그 작은 움직임과 진심이 모여, 내가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후회 없는 흔적이 될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먼 훗날, 내가 만든 이 이야기를 누군가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면, 그 사람 역시 시간의 잔물결 속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과 생각을 하며 작게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 그날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시간을 마주한다. 흘러가는 시간은 멈출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혹은 우리 자신에게 더없이 소중한 흔적으로 새겨지기를, 나는 그렇게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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