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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소풍 Dec 03. 2023

강원도

 휴식 그리고 용기

'오늘 일찍 퇴근합니다.승진은 안되었어요.'

남편의 짧은 문자였다.한 동안 멍했다.살짝 예감은 지만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저녁 일정을 취소했다.'칼퇴합니다.맛있는거 먹어요~'


시동을 걸며 전화를 걸었다.

"지금 출발해요.뭐 먹을깡?"일부러 힘찬 목소리를 내봤다.

"어.일단 집에와서 생각해 보자,"

잠을 좀 잤나보다..피곤하고 노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생긴 핫한 고기집을 갔다.회사 송년회 행사인데 일찍 나왔다고 했다.동네 극장에서 서울의 봄 영화를 봤단다.심정도 그런데 영화도 분통이 터졌다고 한다.평일 오후 영화보러온 사람중 4,5십대 아저씨들도 더러 있었다고..그들은 어떤 사정으로 그 시간에 극장에 앉아있을까 잠시 생각해봤다.


남편은 작년에도 한번 승진에서 미끄러졌다.

"승진이 안됐어.미안해.."

그 날은 오늘보다 더 가슴이 먹먹했다.승진이 안된것 보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이번엔 승진 안되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마.자기가 나한테 뭐가 미안해?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이번엔 성실하게도 아내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누가 된거야?"

"♡♡♡는 됐어."

"안 사람도 있지?"

"나 말고 ###도  안 됐어."

승진  되면 목.금.토는 쉰다고 예고했었다.

이미 승진 포기한 친한 선배들이

다음날 스크린 골프치고 밥 먹자고 한단다.

"잘 됐다.자기가 잘 살아온거야.승진이고 뭐고

주위에 생각해주는 선배들과 동료가  다는

최대 축복이라고 나는 생각해.잘 됐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많네~동네 핫플이 맞긴 맞군!"

일부러 밝은티를 내려고 애쓰고 싶지 않았다.

역시 남이 구워주는 고기맛이 최고다.

아들같은 알바생들이 계속 다니면서 고기를 뒤집었다 뒤집었다 하며 잘라주었다.


"새로 한 병 주세요."

간수치 땜에 끓었던 소주도 한병 시켰다.

절인 배추와 고사리 나물을 숯불에 구워먹었는데

고기보다 더 맛있었다.


생각할수록 남편이 안쓰러웠다.30대와 40대를 가정도 뒤로 하고 토요일도 반납한 채 일해왔고 회사에 대한 열정과 애정도 누구보다 많았던 남편이었다. 새벽 4시에 들어와 한 시간 눈 붙였다 씻고, 아침 6시에 대기 중인 택시 타고 출근하던 남편이었다.없는 시간에도 틈만 나면  아이들과 시간 보내려고 캠핑 떠나주던 남편이었다.나름 회사에서 보상도 받았다.미국 MBA도  다녀오고 해외 주재원 생활도 해보았다.흙수저 출신으로 개미처럼 일만 열심히 하고 후배와 동기들을 살뜰히 챙기고 배려하는 남편이었다.


"그렇게 일만 하다가 나중에 병 들어서 나한테 오기만 해봐!"

 때는 직장생활과 육아,살림,시부모님에게 며느리에 아들 노릇까지 하는게 힘들어 속으로 욕해왔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 남펀이 요즘은 하나 둘 아픈데가 생긴다.

손가락.발목,눈,간에 당뇨까지..


깻잎  장을 고기위에 올려놓는데 갑자기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어~~울어?왜 그래?"

"내가 자기 옆에서 보아온 세월이 얼만데.."

"에이 왜 울고 그래~"

"자기가 승진 못 해서 우는게 아니야.안쓰러워서 우는거지."

"에이..참.나 원.."


이번엔 남편도 휴지로 눈을 닦는다.

"왜 이렇게 고추가 맵냐."

이 식당을 오래오래 기억할것 같다.


집에 오자마자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숙소부터 찾았다.

일본을 다녀올까?제주도? 평소에 안가던 서해안을 다녀올까?한참을 숙박앱을 다니며 항공권까지 검색하다가 결국 우리가 예약한 곳은 늘 다니던 강원도..

설악산 울산바위도 장엄하게 눈앞에 놓고

경포대 바닷바람도 시원하게 보자.


 나를 출근시켜는  일도 생기는구나..

"돈 많이 벌어와~^^있다 데리러 올께"

차로 내려주며 농담하는 모습도 쓸쓸해보였다.


양양 고속도로를 들어서자 씽씽 달린다.일요일에 차막히면 어쩌나..살짝 염려도 됬지만 에라 모르겠다.

그건 그때 생각하고 우리는 즐기기로 했다.

저녁에 대포항에서 싱싱한 회도 먹고 숙소 와서는

하이볼 한 잔에 오징어순대.새우랑 뻥게튀김도 먹고 놀았다.

해뜨는 아침에

장엄한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는 기가 막혔다.

늘 오던 속초인데 아직도 모른곳이 참 많았다.

조각공원에서 작품보며 제목 맞추기 놀이도 하고

예쁜 공방가게도 둘러보았다.

얼굴도 모르는 작가의 작품에서 코끝까지 찡해오는

위로와 감동을 받을 줄은 예전엔 몰랐다.

점심으로 먹은 황태구이는

강원도의 맛을 더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오래된 서점도 둘러보고 페쇄한 조선소를 개량한 까페에서 청량한 호수와 함께 한적한 오후를 보냈다.

이게 휴식이지~

마카롱 가게에서 예쁜 수제 마카롱도 사먹었다.

강릉중앙시장도 구경하고 

 장칼국수와 옹심이 수제비도 맛있었다.


컴컴한 바다를 깜빡거리며 비춰주는 등대에도

희망과 위로를 느끼는 겨울 밤이다.


그리고 해돋이와 함께 하얀거품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몰아치는 힘찬 파도가 다시금 용기를 주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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