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이 세상은 공정한가?
1,승자와 패자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진다.그런데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우리를 공동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능력은 일종의 폭정,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능력주의 신앙은 승자에겐 갈채하며 패자에겐 조롱한다.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패자에겐 헤어나기 힘든 좌절을 주게 된다.
2.’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부는 재능과 노력이 상징이며 가난은 나태의 상징이라는 현대인의 친숙한 생각은 과연 옳은 것일까..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도불구하고 교회의 행동은 능력주의를 다시 불러일으킨다.루터의 엄격한 은총은 반능력주의적이었다.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하는 것이다.그런데 다시금 신학에서는 행함을 통한 구원을,가톨릭에서는 예식을 중시하고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일고있다.이것은 교리로서의 후퇴이다.
차별에 반대하고 기회를 확대하는 일은 가치있는 일이다.
3.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에서 비롯된다.노론적인 불평등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다. 둘째, 대학 학위가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이라는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고 노동의 명예를 줄이 고졸자의 위신을 떨어뜨린다.셋째,,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때 가장 잘 풀릴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이 옳은것일까..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다.
4.최후의 면책적 편견,학력주의
역사를 보면 학력과 실천적 지혜,공동선 실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다.흑인, 노동계급, 빈곤층, 저학력자..미국인은 이 중 저학력자에게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낮은 학력은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본다.그래서 자기 책임이 더 크고 비난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저학력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5.성공의 윤리
상승을 허용하고 찬양하는 사회는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혹독한 판결을 내리게 한다.그것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이다.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능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자격지심과 합쳐진다.그래서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과연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그리고 재능은 진정 자신만의 것일까..사회적 상승담론은 과연 정당한가..
재능을 갖게 된건 행운의 결과이다.성공이란 재능과 노력의 혼합물이고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될 수 없다.하이에크는 ’내가 가진 재능은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 주는 재능은 것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 다.어떤 능력과 업적이 찬양받을만한가를 정하는건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가치관이며 그것은 ‘좋음’의 영역이지’ 옳음’의 영역이 아니다.
6.인재선별기로서의 대학
고등교육을 기회로가는 주 관문으로 삼는데 그러려먼 사회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즉 모든 사회경제적 배경의 유능한 학생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그들이 학비를 낼 능력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등교육을 초고도 경쟁을 거친 선별도구로 한 선은 민주주의 교육 모두에 건전하지 않다.과연 대학이 누가 인생의 승자가 될지 재능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별하는 역할을 받아야 하는가..
사교육의 힘으로 sat 점수에서 일한 입장인 부유한 집 자녀들에 대응해 더 이상 그런 시험을 입시 요강에 넣지 않음으로 공정하게 할 수도 있다.성취와 그 사람의 가치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가드너).미국이나 한국같은나라..부모의 개입이 심각해서 불평등이 심하게 두드러지는 나라이며 스웨덴,일본은 불평등이 비교적 덜 불거진 나라.부모들의 극성도 덜 나타났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 않게 지역 대학,직업훈련소,노조에서 잘 될 수 있다.성실한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7.일의 존엄성
능력주의시대는 일의 존엄성을 꺾아내리고 있다.’일’을 통해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모든 노동은 존엄하다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이 인상적이다.
경제가 어려울때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보전을 해 주자는 것.이 대책이었다.사라진 임금을 벌충을 할 수는 있지만 자기 일의 존엄성을 확신할 수는 없다.무책임한 포퓰리즘이다.이것은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에서도 볼 수 있다.워런 버핏 처럼 금융으로 이득을 창출하는 것은 부정적 생각이 든다.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 가 있는가..일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
결론: 능력,그리고 공동선
애덤 스미스의 아메리칸 드림.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다.
-미국의회도서관 을 보라. 노인도,젋은이도 가난뱅이도부자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데 석여 책을 보고 있다.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동되는 확실한 사례다.-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나며 우리의 의견에 관해 타협하고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수 있다.이것이 우리가 기르는 공공선의 방법이다.
사회속의 우리 자신을,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신의 은총인지,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이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 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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