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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31. 2022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오해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형제가 지은 죄를 몇 번 용서해줄까요 질문했습니다.

일곱 번이면 될까요?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이 비유를 문자 그대로 보면 무제한 용서를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제한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실행 가능성이 전혀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는 베드로에게는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라고 가르쳤으면서도, 정작 비유 속의 주인은 겨우 한 번만 용서하고 두 번째는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베드로보다 훨씬 낮은 기준을 가진다고 말합니다(Scott, p.159).

예수님은 이 비유를 어떤 의도로 가르쳤을까요?

저는 자크 엘룰의 관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Ellul, pp.313-323)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두 가지 잣대, 곧 자비와 정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자비는 사라지고 정의로 다스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랍비의 가르침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라고 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도 바라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것을 잘 참지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즐겨보았던 중국 무협 영화나, 서부 영화는 모두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죽이거나 망가뜨리는 복수를 정당화하는 영화입니다.

현대 드라마도 복수를 주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복수를 정당화하고, 약자가 강자를 넘어뜨리고 복수할 때 통쾌함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본능에 따라 자비보다는 정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합니다.

자끄 엘룰은 말합니다.

사랑과 자비로 정의를 뛰어넘으려면 왕(하나님)이 직접 개입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Ellul, pp.314)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곳은 어디고, 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자끄 엘룰은 이 비유에서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는 엄청난 빚의 탕감이고, 둘째는 그 탕감이 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가이고, 셋째는 심판입니다.(Ellul, pp.315)


이 비유가 말하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들어갈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큰 빚을 지었는지 알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고, 인격이 깨어졌고, 삶이 망가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혔기에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직접 개입하셔서 정의 대신 자비를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우리가 짊어져야 했던 모든 죄의 빚은 탕감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탕감받은 빚의 실체입니다.


두번째로 빚의 탕감이 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시켰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 누군지를 이제 세상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는 구원의 기쁨과 확신, 죄 용서받은 기쁨과 확신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타인에게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사실 비유 속에 나오는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빚진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가 빚진 돈을 갚지 못할 때 고소 고발하는 것은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정한 규칙과 법이 있습니다.

인간사에서 법과 탐욕과 돈의 지배를 빼면, 남는 게 거의 없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경험할 때 ‘정의’를 바로 세워달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정당한 요구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움직입니다.


문제는 이 종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고 자비하심으로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디자인하신 참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칙이 세상에서는 타당해 보여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의 태도, 삶의 방법,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세상의 방법을 따른다면, 그건 곧 하나님의 계획을 망가뜨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그리스도인에게 하늘의 법을 이 땅에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또 기대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완벽히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제 세 번째 주제 곧 왕의 심판입니다.

심판 받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입니다.

은혜의 법, 용서의 법, 사랑의 법을 따라야 할 공동체가 세상의 법을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화려한 건물에서 거룩한 형식의 예배를 드린다고 하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 대신 세상 법을 따른다면 그건 심판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커다란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증인으로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의 삶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상품을 걸고 교회로 유인한다고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실천될 때 확장되고 성장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로 살았는지, 날 선 검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살았는지 판단하실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가 돈과 세상이 말하는 규칙과 법을 따지며 산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타인에게 보여야 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심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삶 가운데 있습니다.

나도 망하고 타인도 망하는 길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율법주의자들입니까?

남의 허물과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그들에게 용서와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자들입니까?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Scott, Bernard Brandon, Re-imagine the world : 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김기석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Ellul Jacques, On Freedom, Love, and Power(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전의우 옮김, 비아토르, 2017


https://youtu.be/LRswevd9m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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