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 창문 너머를 보았다.
교정은 깨끗한 정장에 두 손 가득 꽃다발을 든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즐거울 것도, 괴로울 것도 별로 없는 학창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나, 숲 속 교실을 산책할 때도, 심지어 도서관 앞 수영장에서 수영할 때도 늘 혼자였다.
교실 안은 흥분과 기쁨이 뒤엉켜 있었다.
그럴 수록 나는 더욱 차분해졌다.
어머니는 일 년 째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아버지는 부흥회 가셔서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졸업식에 가지 못해서…”
아버지의 말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진심을 담지 않은 말을 서로 나누었다.
창문 밖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엔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드디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가도 좋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실 문을 나섰다.
학교 정문까지 환영객으로 가득했지만, 내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졸업식은 그렇게 끝났다.
정문 앞은 한산하였다.
늦었는지 꽃을 들고 뛰는 사람이 언뜻 보였다.
외로움은 그렇게 내 인생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외로움은 인간의 고질병이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도 외로움은 찾아올 수 있다.
친구와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중에도 불쑥 찾아오는 게 외로움이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사연으로 눈물 흘리게 되는 건 외로움 때문이다.
외로움이 깊어지면 우울증이란 몹쓸 병에 걸린다.
목회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오면서 외로움은 나의 가장 친한 벗이 되었다.
사실 목회할 때도 늘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애써 감추고 살았을 뿐이다.
이제는 그 아픔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외로움을 깊이 들여다 보며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외로움 속엔 사명이 있다.
외로워 아파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외로움끼리 만날 때 가시가 될 수도 있지만,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다.
외로운 사람끼리 아픔을 살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회복을 경험한다면 그건 축복이다.
외로움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소명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