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깊은 밤에 강 하나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중략)
이렇게 험한 물을 건널 제면,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쳐들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머리를 들고 묵묵히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라 여겼다.
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소용돌이치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고 눈은 물결을 따라 내려가는 듯하여 어질어질한 것이 금방이라도 물로 빨려 들어갈 듯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러니,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건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숫제 눈을 돌려 물을 쳐다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긴, 그 와중에 잠깐 동안의 목숨을 위하여 기도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중략)
내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궤석(안석과 돗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 박지원 원저 / 고미숙 지음 / 아이세움 / 171~173쪽)
연암 박지원은 열하를 가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 굽이치는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다.
생사가 언제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마침내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도를 깨달았다고 소리친다.
천자문에 성정정리 심동신피(性靜情逸 心動神疲)란 말이 있다.
뜻을 풀면
“성품이 고요하면 정서가 편안하고,
마음이 움직이면 정신은 피곤하다.”는 뜻이다.
요즘 들어 밤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나이 든 탓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아직 이른데.
아무 생각하지 말아야지 밤마다 다짐하지만, 한 번 찾아온 불면증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나도 어디든 머리만 붙이면 꿈나라로 떠날 때가 있었다.
하루를 마치고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이 잠을 잘 수 있을 때가 좋았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될수록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탁월한 영성가로 알려진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이런 고백을 하였다.
“내가 얼마나 쉽게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는지…"
나는 그의 솔직한 고백에 위로를 받는다.
아주 작은 일, 정말 보잘것없는 하찮은 일에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자책할 땐, 헨리 나우웬의 고백이 정말 위로가 된다.
이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영성이 없다고 책망하기도 한다.
그분의 눈에는 그럴지 모르겠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정신이 건강해지고, 정신이 건강해지면,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가 나오는데
나는 몸은 한가로운데 마음은 번잡하고 머리는 아프기만 하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말했다.
“관 뚜껑 덮을 때 그 사람이 평가된다. 그러니 성실하여라! 최선을 다하여라!"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여 산다고 사는데 미련은 자꾸 내 뒤 꼭지를 잡아당기고 있다.
“왜 그랬을까?"
“잘할 수도 있었는데."
“넉넉하므로 품어 줄 수도 있었는데."
문득 천상병 씨의 귀천이란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연암이 생사를 내려놓고 도를 깨달았듯이, 초탈함으로 하늘을 바라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