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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07. 2015

바기오의 키리노 힐

바기오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바기오의 전경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했던 곳.

세상 사는 게 언제나 쉽지 않지만, 그때만큼 사람들이 차갑고 치사하단 생각이 들 때가 없었다.

단돈 100만 원으로 바기오에서 4명 가족이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은 지금 돌이켜 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비자, 집 렌트비만으로도 50만 원이 훌쩍 넘었으니 남는 돈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20만 원으로도 사니 100만 원이면 부자로 살 수 있다고 말하던 그들을 이곳에 와서 살아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도 쳤었다.

그때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나를 품어주던 곳이 바로 바기오다.

산 페르난도로 내려가는 길목의 바기오

굳어진 나의 마음을 녹여준 것이 바기오의 사람들이었다.

마낭 마지, 에밀리, 밍, 로즈, 알깐따라,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수 많은 사람이 언제나 나에게 미소를 보내주었다.

떠듬떠듬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에도 결코 비웃지 않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경청하여 주었다.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던 마낭 마지가 살던 곳은 바기오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키리노 힐이었다.

마지는 나에게 영어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선교사역을 하도록 훈련시켰다.

매일같이 키리노 힐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였다.

바기오의 자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도 취업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필리핀의 젊은이들은 정말 취업하기가 어렵다.

키리노 힐의 가정들을 찾아다니며 느낀 것은 남자들이 일이 없어 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부들은 그나마 헬퍼나 허드렛일을 할 수 있지만, 남자들은 70% 이상이 집에서 쉬었다.

온종일 집에서 아이들을 보거나, 빨래하거나, 쌀을 펼쳐놓고 돌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밝은 낮으로 나를 대하였다.

서로 가난한 처지였기에 마음이 통했는지도 모른다.

키리노 힐

차들도 매연을 뿜어내며 힘겹게 올라가는 그 언덕을 오르내리며 나는 기쁨을 되찾았다.

감사와 기쁨을 되찾자 마음의 눈도 열렸다.

아름다운 바기오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울창한 소나무 숲, 언제나 푸르른 하늘, 신선한 공기, 여기저기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 공원과 호수.

번함 파크
번함 파크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산속 오지에 점점이 집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궁핍함보다는 그들의 치열한 생존의식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치열한 생존의식은 대개가 삶을 피곤하게 할 만한데 바기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어둡고 답답한 미래지만, 그들은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키리노 힐

20년이 지나 다시 키리노 힐을 찾았다.

여전히 남자들은 햇볕을 쐬며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을 보면, 떼로 몰려와 “헬로” 하면서 인사를 한다.

가끔은 “사랑해요. 안녕하십니까?” 한다.

어느새 이 아이들은 우리의 국적을 파악하였다.

펄쩍펄쩍 뛰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의 장래가 어둡지 않기를 소망했다.

한 여자아이를 붙잡고 물었다.

“이름이 뭐니?”

“주디스예요.”

“오 내 딸 이름이 주디인데 비슷하구나.”
“몇 살이니?”
“9살이요.”
너무나 귀여운 아이다.

“장래 뭐가 되고 싶니? 선생님? 과학자? 직장인? 모델? 가수?”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던 아이가 ‘가수?’ 하니까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너 유명한 아이돌 가수가 되어서 한국에도 왔으면 좋겠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꼬마 아이들을 사진 찍고 있는데 2층 창문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18살 소녀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이름을 물으니 그레이스라고 한다.

주디스
그레이스

가파른 언덕에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돌들을 쌓아서 만든 집들은 1층이 제일 작고 2층은 조금 넓고 3층이 제일 넓었다.

그 언덕에 사는 사람들에게 제일 힘든 것은 물이었다.

물 공급이 원할지 않기에 재활용의 지혜를 총동원하였다.

화장실에는 휴지는 없고 조그만 프라스틱 그릇에 세탁한 물, 세수한 물들을 모아 여기저기 놓았다.

용변본 후 더러운 손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변기에 물을 부어 처리한다.

최악의 환경이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키리노 힐 사람들을 응원한다.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라!

키리노 힐

20년 만에 찾은 바기오의 키리노 힐은 변함없이 나에게 격려와 힘을 주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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