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얼마든지 좋은 말을 많이 할 수 있다. 생각으로는 얼마든지 선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평상시에는 누구보다 도덕적일 수 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예의와 매너를 차릴 수 있다.
그런데 생과 사가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면?
죽음의 골짜기에 굴러떨어지기 일보 직전이라면?
20세기 초 비극적인 해양사고를 영화로 그린 타이타닉에는 갖가지 사람이 있었다. 저마다 살고 싶은 욕망으로 아우성을 치는 그 상황은 당하지 않고선 차마 말할 수 없다. 구명보트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고,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넘쳐 날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매너 좋게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먼저 태울까? 그리고 그 후는 어떤 기준으로 순서를 정하여 보트에 태울까? 시시각각 배가 침몰하는 급박한 순간에 어떤 도덕적 기준을 적용할까? 평상시라면, 안전한 가운데 그저 논리적인 토론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두고 토론할 수 있다. 서로가 웃으면서 말할 수도 있다. 내가 백번이라도 양보하지 하는 넓은 아량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라면 어떻게 될까? 거기 도덕과 예의, 종교와 매너가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T.M.Plautus)가 했던 말을 언급하면서 이 상황을 설명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Homo homini lupus)"
최악의 상황이라면, 도덕보다는 강자의 힘이 지배한다. "내가 먼저 살아야지!” 하는 논리가 그 어떤 것보다 앞선다. 그 전에 배웠던 모든 규칙과 도덕, 법률과 예의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홉스는 인간의 본능적 야만성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늑대 같은 인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예외가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한다. 도덕을 초월하여 늘 절대적 진리를 말하고 가르치는 기독교인이 예외적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요즘 교회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내가 먼저 살고 보자.”는 이유로, 선교사들의 후원을 끊어버리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하던 기독교가 이런저런 핑계로 몸보신에 앞장선다면, 세상은 늑대로 가득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도 아닌데, 조금 살기 어려워졌다고, 남을 돌보는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