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 마지막 성배”를 보았을 때 "세상에 저런 곳이 있구나. 내가 죽기 전에 저기 한 번 가보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실제로 뉴욕 타임스에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역사 유적지 1,001곳을 선정하면서 페트라를 첫 번째로 꼽았다. 모압 광야 체험을 한 뒤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에 페트라를 향해 가면 갈수록 버스 안은 약간의 긴장과 흥분으로 출렁거렸다. 그런데 바깥 날씨는 고약하게도 비를 뿌리고 있었다. 안내 해주시는 아브라함 선교사님이 불길한 소식을 전하였다. 오늘 비가 많이 와서 페트라는 물에 잠기고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서 문을 닫았는데 내일은 열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암만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페트라를 보지 못한다면, 정말 아쉬울 것 같았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였다.
호텔에 도착하였을 때 비는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걱정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바깥 날씨부터 점검하였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안개 낀 새벽에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소식에 의하면, 오늘 오후에 다시 비가 온다고 하니 아침 일찍 빨리 구경하고 나오잔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호텔 앞에 있는 페트라 입구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이 입구에 들어서자 저 멀리 말과 마차를 끌고 아랍인들이 달려왔다. 말 타는 데는 5달러, 마차를 타는 데는 40달러 하면서 호객행위를 하는데 이곳이 관광지인 것이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말과 마차로 휙 지나치는 것이 너무 아까워 우리는 걷기로 하였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지는 협곡(As-Siq)은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가면서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계속하여 찰칵찰칵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알 카즈네’에 도착하였다.
알 카즈네는 페트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건물 중 하나이다.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으로 페트라의 상징이다. 헬레니즘 양식을 따라 6개의 원형 기둥이 2층을 받히는 구조로 건축하였다. 화려한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텅 비어 있으며 나바테왕 아레타스 3세의 무덤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페트라는 무덤의 도시라 할 만큼 여기저기 동굴 무덤이 산재해 있다. 한동안 알 카즈네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마음껏 여유를 즐겼다.
'그래 이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어!'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내가 쑥 들어온 느낌이었다. 페트라는 나바티아인이 에돔 족속을 몰아내고 세운 산악도시다. 나바티아인은 BC7세기부터 BC2세기경까지 아라비아 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으로서, 에돔 사람보다 훨씬 우수하고 화려한 문명을 만들었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수로 시설을 완비했고, 극장과 온수 목욕탕을 갖추었다. 이곳은 왕의 대로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중간 기착지로서 향료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나바테 왕국의 전성기는 어떠했을까? 조용히 상상해본다. 사실 페트라를 하루 만에 구경하기는 너무나 광대하다. 2시간 이상 걸어서 산 정상에 올라가면 알 데이르(Al-Deir)가 있다. 기원전 1세기경, 신전으로 지었는데 로마 지배하에서는 교회로도 사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페트라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야간에 음악 행사가 있다. 입장한 모든 사람이 촛불을 밝힌 가운데 연주회를 하는데 상상만 해도 좋을 것 같다. 화려한 장밋빛 알 카즈네 앞에서 아름다운 캔들 나이트(Candle Night) 행사는 시간 관계상 참석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왔다면 페트라에서 며칠 머물면서 충분히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알 데이르와 캔들 나이트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였다. 모두 발을 재촉하는데 그래도 볼 건 봐야겠지 하는 마음으로 더 둘러 보았다. 알 카즈네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로마 시대 때 만든 원형 극장이 눈에 띈다. 바위를 하나하나 깎아서 만든 계단이 33층이고, 좌석은 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극장이다. 이곳에서는 2008년 파바로티 추모 공연이 있었다.
성경에서 나바티안 왕국에 대하여 거론한 것은 고린도후서 11장 32절이 유일하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여기 나오는 아레다 왕은 나바티안 왕국의 아레타스 4세다. 당시 나바티안 왕국은 수리아(지금의 시리아) 다메섹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하였다. 그런데 아레타스 왕이 어찌하여 바울을 체포하려고 다메섹까지 군대를 파송했을까? 여기에 성경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금 다메섹에 나타난다. 그리고 다메섹의 바울을 체포하라고 나바테 왕이 명령을 내린 것을 볼 때, 아라비아 광야에서 다메섹까지 3년 동안 바울의 행적과 나바티안 왕국은 무슨 연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단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되어 있을 뿐이다.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자신을 성찰하며 성경을 연구했다는 학자도 있지만, 그가 3년 내내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아라비아 광야 바로 곁에 있는 나바티안 왕국의 페트라를 찾아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일 바울이 나바티안 왕국 페트라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소동을 일으킨 후(바울이 어느 도시든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소동이 일어나곤 했다.) 다메섹으로 간 것이라고 한다면, 고린도후서 11장 32절에서 아레다 왕이 바울을 체포하려고 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사건의 경위는 나중에 천국 가서 바울에게 물어보면 가장 확실하겠지만, 나는 왠지 바울이 페트라에서 복음을 증거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