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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r 31. 2016

예루살렘이냐? 가이사랴냐?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 성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지 천 년이 지났다. 

산악지대 볼품없이 작은 터에 세워진 이 도시가 이름을 떨친 것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 성전 때문이다. 

그 성전이 유대인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해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나라가 멸망하여도 그들을 하나로 끌어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셨다. 

성전을 중심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인들의 행태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모두 강제 추방했다. 

가이사랴는 구약성경과 사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도시다. 

가이사랴는 주전 4세기 시돈의 왕 스트라토(Strato) 때 비옥한 샤론 평야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산물을 수입하기 위하여 건설한 항구 도시다. 

처음에는 작은 해안 마을이었지만,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얻어 이 땅을 얻게 된 헤롯은 황제에게 헌정하기 위하여 대규모 계획도시로 새롭게 건축하였다. 

유대인의 인기를 얻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헤롯이 이번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가이사의 인기를 얻기 위해 황제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 하였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로마 당시의 건축 양식을 따라 야외 원형 극장, 신전, 마차 경기장, 정교한 수로 체계, 인공 항구 등을 건설하였다. 

그것은 보통의 재료가 아닌 백색의 돌(대리석)을 사용하여 매우 화려한 궁전과 함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방불할 만큼 거대도시였다. 

고고학자들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해안가 특성상 도저히 배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1년 모래로 덮인 언덕에서 이스라엘의 고대 유물부장이었던 예이빈(S. Yeivin)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반암좌 좌상을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1980년에는 수중 발굴 작업을 통해 가이사랴가 국제적인 항구도시임이 밝혀짐으로 요세푸스의 기록도 대부분 옳은 것이 확인되었다. 

가이사랴는 헤롯이 10년에 걸쳐 만든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 치세 28년 192회 올림픽 경기 대회 때에 가이사랴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황제를 위하여 성대한 축제를 개최하며 음악 공연과 운동경기를 펼쳤다.

또한 물이 없는 가이사랴의 물 공급을 위하여 도수로를 건설하였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헤롯은 갈멜 산의 슈니(Shuni) 샘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400m의 터널을 통과한 수로는 총 15km에 달한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가이사랴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헤롯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이곳 가이사랴에 내려와 휴식을 취하였다. 

그는 호화로운 왕관과 자주색 왕복을 휘날리며 일장 연설을 가이사랴 경기장에서 했다. 

모인 사람들은 헤롯 앞에서 소리높여 그의 연설에 화답하였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행12:22)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소리에 헤롯 아그립바는 한층 기분이 좋아져서 손을 휘저으며 허풍을 떨었을 것이다. 

그 순간 "주의 사자가 그를 치니 그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행12:23)고 기록하고 있다. 

가이사랴를 세운 헤롯 집안의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이후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이 직접 다스리며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수도가 되었다. 

마차 경기장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가이사랴는 한 마디로 세속도시였고, 그 어디에도 기독교적 상징은 없었다. 

오히려 로마의 신전만 가득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국제도시로 점점 부상하는 가이사랴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무너진 예루살렘에 의미를 부여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예루살렘을 회복하려고 반란도 일으키고 별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헤롯의 궁전

이때 기독교인들은 과감히 예루살렘을 버리고 가이사랴를 새로운 기독교 선교 기지로 받아들였다. 

먼저 빌립 집사가 가이사랴에서 선교 거점을 마련하였다.(행8:40)

그 후 가이사랴는 바울의 선교 여정에 반드시 거쳐 가는 코스가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고향 다소로 돌아갈 때(행9:30) 그리고 2차 3차 선교여행을 끝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도 가이사랴를 이용하였다. (행18:22, 21:8)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되어 다시 베스도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로 내려와 2년 동안 있으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무엇보다도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를 받아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 집안에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곳이 바로 이곳이다.(행10:1,24)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이사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누가는 하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가이사랴를 거쳐 로마로 터키로 전파됐음을 보여주고자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후 가이사랴는 복음전파의 전초기지요, 복음 전도자들의 경유지와 통로가 되었다. 

초대 교부 중에 아리우스와 유세비우스가 이곳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파하였고, 교부 제롬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유대교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어떻게 해서든 회복해야겠다는 아집 속에 머물러 있었지만, 

기독교는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반응하였기에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비록 세속의 도시고, 우상의 도시이지만, 가이사랴의 중요성을 깨달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기꺼이 가이사랴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기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를 프론티어 정신(frontier spirit)을 가진 종교라고 한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과감히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가이사랴에 물을 공급하는 로마시대의 수로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중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하나 꼽으라면, 가이사랴를 꼽을 수 있다. 

옥색 빛 지중해를 끼고 만들어진 해안 도시 가이사랴에서 우리는 주저없이 지중해 바다에 발을 담갔다. 

지금도 가이사랴에서는 매년 여름철이 되면, 원형극장에서 국제적인 이스라엘 음악제가 열린다.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 바이올린의 대가 아이작 스톤, 명 지휘자 주빈 메타와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이곳에서 연주하였다. 

푸른 지중해 바다에 노을이 지는 순간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유명한 음악가는 아니지만, 그 원형극장에 앉아서 찬양하였다. 

God is so Good! ~~

전 세계에서 관광 온 사람들은 우리의 찬양을 들으며 열화와 같은 박수를 쳤다. 

찬양 하나로 어느새 우리는 세계적인 인사가 된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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