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하였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불과 8km 떨어진 산 동네다.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을 작은 동네라고 소개하였다. 현재도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서 관리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동네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5:2)
베들레헴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스라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총을 들고 서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보면서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을 8m 높이의 방벽을 쌓아서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이미지는 폭력과 테러 단체처럼 느껴졌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버스는 우리네 시골 촌구석에 있을법한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양각 나팔을 불면서 아랍의 한 상인이 다가왔다. 너무나 밝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봄눈 녹듯이 녹았다. 그의 뒤에는 소소한 먹거리를 들고 오는 어린 소년, 금색으로 도금한 법궤를 들고 있는 상인들이 있었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예루살렘의 차갑고 쌀쌀맞은 유대인들보다 훨씬 정겹게 느껴진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성탄교회를 향하여 걸어 올라갔다. 이곳은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와서 지은 건물터 위에 529년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것이다. 638년 아랍의 오마르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당시 예배당을 다 불사르고 파괴하였다. 그들이 베들레헴의 이 교회도 불 지르기 전에 안에 들어가 구경하는 순간 모두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 그것은 교회 벽에 그려진 화려한 아랍 복장의 동방박사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들의 모습을 본 이슬람은 이 예배당을 불 지르지 않았다. 이후로 이곳은 기독교인들과 모슬렘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되어 현재까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로 약 50%가 기독교인이다.
성경에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7) 이스라엘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모르면 오해하기 가장 쉬운 구절이 바로 이 본문이다. 이 본문에서 오해되는 구절은 ‘여관’과 ‘구유’이다.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에는 여관이 없었다. 여관은 보통 큰 도로를 끼고 발달한 도시에 있다. 베들레헴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마을에 여관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몇백 년 전 조선 시대 시골 마을을 연상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 여관이란 말은 무엇인가?
여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뤼마(katalyma)’는 여관이 아닌 손님 접대용 방으로 번역하는 단어다. 만일 여관이라면 ‘판도케이온(pandocheion)’을 사용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는 사마리아인이 다친 사람은 여관(pandocheion)으로 데려간다. 1)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호적 하러 왔을 때 친척 집에 머무르려 하였지만, 이미 손님 접대용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서 아이를 출산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집 아래 가축을 두는 공간에서 예수님을 낳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말을 많이 키우는 서양인들은 구유라는 말이 나오자 바로 말구유를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이나 소의 구유일 거라고 생각한다. 베들레헴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대부분 말구유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난센스 한 일이다.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며 목축을 주로 하는 이스라엘은 말이나 소를 거의 키우지 않았다. 소와 말은 평야지대에서 농사를 짓거나 전쟁을 할 때 필요한 동물이다. 산악지대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동물은 나귀였다. 지구력이 강한 나귀는 가난한 평민들이 키우는 동물로서 산악지대에 가장 유용한 동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 구유가 아닌 나귀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가옥 구조는 이스라엘의 지형 특성상 동굴을 이용하여 동굴 위에 집을 지었다. 동굴은 양과 염소, 나귀 등 동물을 가두어 두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건물 아래 동굴에서 태어나셨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말을 키우지 않았고, 소는 갈릴리 북쪽 바산 지역에서 주로 키웠다. 오히려 말은 전쟁의 상징이고, 왕과 장군들과 군사들이 주로 타고 다녔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개선식을 하는데 잡아온 포로들과 전리품을 앞세우고 백마를 타고 입성한다. 성경에서 말은 결코 좋은 상징의 동물이 아니다. 반면에 나귀는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전쟁의 승자로 말을 타고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친구로서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셨다. 예수님은 전쟁을 통한 강압적 평화가 아니라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시면서 평화를 이루시려 하였다. 하나님은 결코 예수님을 말 구유에서 태어나시도록 세팅하지 않으셨음이 확실하다.
주(註)
1)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케네스 E. 베일리, 박규태 역, 새물결출판사, 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