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8장
어버이날 70대 아버지를 잔혹하게 살해한 40대 남매가 토막살인까지 계획했다는 뉴스는 충격적이다.
그들은 살인하고도 아주 뻔뻔하고 당당하였다.
자기 아버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며 조금도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사무엘하를 통하여 압살롬이 반역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압살롬은 아버지에 대하여 쌓인 것이 많았다.
다윗은 자기 딸이 강간을 당했는데 마땅히 취해야 할 조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동안 나 몰라라 버려두었다.
그가 형 암논을 죽이고 외가로 피신하였을 때도 모른척하였다.
요압 장군의 중재로 어렵게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압살롬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회피하는 동안 아들의 마음은 상처로 가득하였다.
다시 또 요압 장군에게 부탁하여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제 딴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무려 5년 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다윗은 마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압살롬은 그때부터 칼을 갈기 시작하였다.
그는 4년 동안 반역을 준비하였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모의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다윗은 내버려 두었다.
여동생 다말이 강간당한 이후 무려 11년 만에 압살롬은 반역의 칼을 들었다.
그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마음에 쌓인 원한과 분노도 있었다.
압살롬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못할 것이 없다.
그가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압살롬은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다.
능력도 있고, 인간관계도 좋았다.
이스라엘의 최고로 지혜로운 아히도벨이 그의 편에 섰다는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대부분이 다 압살롬을 지지했다.
그만큼 다윗의 실정이 컸고, 압살롬은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 봐도 이제 압살롬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같아 보였다.
그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 최소 5배 많게 잡으면 10배는 되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모든 지역을 순회하면서 군대를 모아 다윗이 진 치고 있는 마하나님을 향하였다.
다윗의 군대는 4천 명 가량 되었다.
다윗은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 그리고 다윗이 피신할 때 용병들을 끌고 온 블레셋의 장군 잇대를 군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맞붙었다.
누가 봐도 결과는 뻔하였다.
그런데 예상한 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에 압살롬 군대의 전사자가 2만 명에 이르렀는데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
수풀에서 어떻게 죽었을까?
수천 년이 흐르면서 지형지물이 바뀐 지금 다윗시대의 수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간섭하셨다는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들과 싸울 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우박 덩이를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시매 그들이 죽었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더라.”(여호수아 10:11)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은 이미 결정하고 계셨다.
아무리 변명의 말이 많고, 아무리 타당한 명분이 있어도, 하나님은 아버지를 대적하는 압살롬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것은 패륜이요,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패전하여 도망치던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렸다.
그가 탔던 노새는 도망치고 그렇게도 자랑하던 아름다운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무에 달린 압살롬의 모습은 신명기 21:23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저주받은 모습이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냉정한 요압은 압살롬의 심장에 창을 꽂으므로 한 민족끼리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압살롬이 죽자 더 이상의 전쟁은 의미가 없어졌다.
다윗은 전쟁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윗이 기다린 소식은 전쟁의 승패도 중요하지만, 압살롬의 생사도 궁금하였다.
압살롬의 죽음을 전해줄 전령으로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자청하였다.
요압은 아히마아스를 아꼈기에 만류하였다.
사실 다윗에게 사울의 전사 소식을 알렸던 아말렉 소년도,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져왔던 레갑과 바아나도 다윗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하물며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면 살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요압이 만류하였다.
요압은 구스 사람을 시켜 그 소식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아히마아스는 기어코 자기가 가서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였다.
아히마아스와 요압의 생각은 여기서 엇갈린다.
요압은 아히마아스가 승전보를 알리고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히마아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바로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자기가 먼저 달려가 충격을 완화시켜줄 생각이었다.
다윗이 아히마아스에게 말하였다.
“압살롬은 잘 있느냐?”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그 후 구스 사람이 도착하자 다윗이 다시 물었다.
“압살롬은 잘 있느냐?”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전해준 첫 번 소식에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예상하였다.
그렇지만 구스 사람이 확실하게 전해 줄 때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이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아버지의 마음은 이와 같다.
물론 부모 중에 정말 못된 부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녀가 부모에 대하여 반역하고 반기를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 어떤 대의명분을 높이 세운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처단하신다.
압살롬과 그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가 무찌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의 행간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이다.
분명히 다윗이 잘못했고, 다윗이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 다윗을 징벌하고 징계할 자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하나님인 줄 착각하고 칼을 든 압살롬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