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9장
성경은 시, 편지, 예언, 역사 등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기록한 형식을 따라 성경을 읽으면 유익한 점이 많다.
특별히 역사는 복잡한 시대적 상황과 그에 따른 인간의 다양한 반응들이 뒤섞여 있기에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인간 내면의 심리도 파악하며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런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므로 성경을 읽어나갈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하는 것이 바른 독법이다.
아들 압살롬이 다윗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켰을 때 아버지 다윗이 받았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막상 벌어졌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아들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 잘못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후회해보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윗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지파가 압살롬을 지지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훔친 것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압살롬을 지지한 데는 그동안 다윗의 잘못도 적잖은 것이 사실이다.
이스라엘 11개 지파가 군대를 동원하여 다윗을 공격할 때 그는 사면초가였다.
누가 봐도 승산없는 싸움이었는데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그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이 나라를 어찌해야 할까?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칼을 겨누었던 모든 자를 색출하여 처단할까?
이번 기회에 누가 충신이고 누가 반역자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으니 오직 충신만 등용하여 쓸까?
그렇게 한다면 결국 자기를 끝까지 지지한 유다 지파 하나만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배신이 있을지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한다.
다윗의 마음속은 복잡하였다.
다윗은 큰 결단을 하고 통 크게 포용 정책을 쓰기로 하였다.
1.
그는 먼저 압살롬의 군대장관을 했던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등용하였다. (사무엘하19:13)
사실 아마사는 다윗의 조카였지만, 아버지가 이스마엘 사람이기에 그동안 그를 외면하였다.
아마사가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에게 칼을 든 것도 그런 섭섭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아마사를 품어주었지만, 다윗의 심복이고 군대장관이고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요압은 이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요압과 아마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 속에서 후일 잔인한 칼부림을 하게 된다.
2.
두 번째로 다윗은 자신이 피난 갈 때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용서한다.
간신배 같은 시므이는 다윗이 승전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요단 강까지 달려간다.
그는 다윗을 위하여 나룻배를 준비하였다.
“왕이여~~ 왕의 가족이 편안하게 가시도록 제가 나룻배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정성껏 준비한 것이오니 왕이 편하신 대로 사용하시옵소서.~~ 그리고"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19:19)
그가 다윗 앞에 나와 용서를 빌 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빌었을까?
그는 다윗 앞에 나올 때 베냐민 사람 천명을 데리고 나왔다.
자기가 얼마나 유력인사고, 자기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를 은연중에 과시하기 위함이다.
나를 벌하면 이 모든 사람을 등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시므이의 야비한 술책과 마음을 다윗이 모를 리 없지만, 다윗은 그를 용서한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품어서 평화를 이루어보려고 하였다.
그러한 다윗의 심리를 꿰뚫은 시므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이 크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다윗에게 용서를 강요했다.
다윗이 시므이를 용서함으로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불안한 평화였다.
3
세 번째로 다윗은 자신을 대적한 이스라엘 11개 지파를 수용한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11개 지파는 다윗을 끝까지 지지하고 따른 유다 지파를 오히려 책망한다.
"우리(북이스라엘 11개 지파)는 (다윗)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유다지파)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사무엘하19:43)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 편에 선 그들이 유다 지파보다 자기들이 다윗과 더 관계가 있다고 큰소리를 친다.
'유다 지파는 하나지만 자기들은 11개 지파이니 왜 자기들에게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일에 의논하지 않느냐!'고 주장하였다.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자신들이 다윗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진심으로 따르고자 함은 아니었다.
상황이 불리하니까 잠시 뒤로 물러나는 것뿐이지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 다윗을 반대하고 배반할 것이다.
실제로 북이스라엘 11개 지파는 솔로몬 사후 반역하여 나라를 세운다.
그들이 세운 나라는 정통성이 없기에 허구한 날 쿠데타의 연속이었다.
세상의 힘만으로 세운 나라는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정권은 언제든 뒤바뀌어진다.
배신으로 점철된 북이스라엘은 결국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만다.
평화를 위하여 다윗은 나름대로 무진 애를 썼다.
자신에게 등을 돌린 북이스라엘 11개 지파를 포용하여 하나로 만들려고 힘을 다했다.
간신배 같은 시므이도 용서하고, 적장 아마사도 군대장관으로 등용하였다.
과연 다윗이 만들려고 했던 평화는 이루어졌을까?
안타깝게도 다윗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윗이 이룩하려고 한 평화는 인간적인 땜질식 평화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이 모인 평화가 아니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만든 평화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평화를 위하여 인간적으로 타협할 때가 많다.
사람의 수단과 방법으로 만든 평화는 불안하다.
배신자는 아무리 품어주어도 언젠가는 또 배신한다.
그래서 난 반골 기질의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불완전한 평화가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 잠시 잠깐 맛보는 평화가 아닌 영원하고 참된 평화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바로 참된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