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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y 23. 2016

요즘 우리는 너무 뻣뻣하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새롭게 읽기 1.

로이드 존스는 설교에서 반전을 자주 사용한다.
처음에 부정적인 것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고, 처음에 긍정적인 말을 하다가 나중에 부정적인 내용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로이드 존스는 니고데모를 설교하면서 긍정적인 면부터 풀어나가고 있다.

1.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헐뜯고 흠집 내기에 혈안이었다.

니고데모는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비록 유대인의 선생이었지만, 배우려는 겸손함이 있었다.


보통 선생이라 하는 자들은 남을 가르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다.

자신은 정답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여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기 쉽다.

니고데모는 선생이었지만, 겸손히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는 기꺼이 예수님께 나아와 머리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인정하였다.

그는 진리 안에서 더 충만해지고 싶어 주님을 찾아왔다.

그러한 태도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간혹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는 그리스도인을 볼 때가 있다.

자신의 헌신과 충성, 봉사와 섬김, 받은 직분과 사명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이만하면 됐지.’ 그런 생각에 겸손함을 잃어버린 자이다.

교회의 행정과 사역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하면, 믿음이 좋은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정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훌륭한 정치가가 아닌 것처럼, 교회 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 개혁을 위하여 힘쓴다고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참된 믿음은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에서 출발한다. 그런 면에서 니고데모는 아주 훌륭한 자세를 갖춘 사람이었다.


2.

그러나 니고데모에게 부족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가 인간적인 겸손함은 있었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무지하였다.

니고데모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몇 마디 가르침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자신은 유대인의 지도자로 성경을 가르치는 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말은 니고데모에게 큰 충격이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지도자이긴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다."  

“네가 성경을 조금 더 배우고 알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영적 생명이 없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네가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진 것은 칭찬할 만 하지만, 너는 너의 영적 상태를 아직 잘 모르고 있구나."  

“니고데모야 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라! "

"넌 영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정확히 아신다.

주님은 우리의 살 속, 뼛속 신경 속까지 꿰뚫어 보신다.

겉으로는 훌륭한 신앙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자신은 성경을 알고 가르치는 자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 껍데기 신앙인지 다 아신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인간적인 겸손함을 뛰어넘는 영적 겸손함이 필요하다.

주님의 은혜를 진정 받기를 소망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소망이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무지하며, 영적으로 얼마나 밑바닥인지 알아야 한다.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무릎으로 나와야 한다.


인간적인 겸손함과 예의만 가지고는 안된다.

사실 니고데모는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선생이라고 인정하였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인정하였다.

당대 그 어느 바리새인이 이런 태도를 가졌는가?

이런 니고데모에게 칭찬은커녕 오히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찌 보면 좀 냉정하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니고데모를 사랑하였기에 인사치레보다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는 인간적인 예의와 겸손보다 영적인 갈급함이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꿰뚫어 보신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교회에서 어떻게 일하느냐?

얼마나 헌신적인가?

교회 개혁과 갱신을 위해서 얼마나 힘써서 정진하느냐?

주님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 직분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이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충만히 공급받기를 소망한다면, 그 모든 인간적인 수고와 자랑거리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먼지를 뒤집어쓰는 외형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며 눈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니고데모에게 한 가지 부족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도 이점이 아닐까?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29:1)

요즘 우리는 너무 뻣뻣하다.


로이드존스 "요한복음 3장 강해"의 첫번째 설교 '니고데모'를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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