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설교 새롭게 읽기 2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좋다는 말을 많이 해도 즐겨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설교가 길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때문이다.
어떤 분의 설교도 마찬가지겠지만, 설교는 일단 은혜받기 위한 자세로 읽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받아적는 것을 싫어하였다.
설교는 은혜받기 위하여 듣는 것이지, 공부하거나 비판하기 위하여 듣는 것이 아니다.
설교를 통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은혜를 충분히 받은 후 설교를 연구하고 공부하여 얻을 것이 있고 그만한 내용이 있다면, 훌륭하다 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내게 은혜와 영감 그리고 많은 깨달음을 준다.
모두가 그의 설교를 사랑하고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모태신앙인이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인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나는 기독교에 대해, 성경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했고, 또 그걸 매우 좋아했다.
나는 니고데모형 신자다.
나의 주변에는 나와 같은 니고데모형 신자가 있다.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니고데모형 신자가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와 잘못이 있다.
그것은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님에도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난 항상 그리스도인이었어요. 그리스도인이 아닌 적이 없지요. 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 자랐어요."
그렇지만 그게 정말 사실일까?
1.
니고데모는 자기 삶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요 선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기 삶에 불만을 느끼고 더 배우고, 더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우리 주위에 니고데모와 같은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자기 삶에 불만을 느끼고, 교회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사람을 찾으면,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변에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면, 인터넷을 뒤져 보기도 하고 서점에서 영성 있는 책을 사서 읽기도 한다.
그러다 자기 마음에 맞는 것을 발견하면, 드디어 감탄한다.
“야! 여기에 길이 있다."
그러면서 더욱 현실에 대한 불만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발견한 길과 달리 주변의 크리스천들은 상식도 통하지 않고 교회는 답답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성 있는 지도자나 크리스천이 주변에 없다는 사실에 그는 안타까워한다.
이런 상황을 알지도 못한 체 건성건성 신앙생활하면서도 만족하는 사람을 볼 때 마음이 무너진다.
자신의 상황과 현실에 불만을 느끼던 차에 예수님처럼 영성 있는 분을 만나면, 그는 자신의 체면과 신분을 상관치 않고 찾아가 본다.
그런데 그의 마음과 달리 그의 현실은 어떠할까?
예배드리는 태도는 성실하지 못하다.
신앙생활 하는 태도 역시 언제나 불만으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예배가 마음에 들지 않고, 목회자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영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고, 남들은 저차원의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형 신자에게 단호히 말한다.
“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2.
니고데모는 영적 지식을 배우고 익히면 되는 줄로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의 사상을 연구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기독교의 개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하면, 훌륭한 신앙인이 될 줄 생각했다.
이런 사람과 대화해 보면, 기독교에 대해 놀랄 만큼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을 발견한다.
독실한 신앙인이 빠지기 쉬운 위험은 성경 지식을 쌓는 일과 성경 공부에 취미를 붙이는 것이다.
어디 좋은 책이 있으면, 어김없이 사서 읽어본다.
좋은 설교자를 찾아서 설교를 들으며 빼곡하게 필기한다.
그가 입을 열어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런데 말로는 성경을 들었다 놓아다 하지만, 실상 그의 삶을 살펴보면 메마르고 냉랭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다.
기독교는 이해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니고데모형 신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성경을 공부하긴 하지만, 성경에 지적인 인식을 뛰어넘는 영적인 부분이 있음을 놓치고 만다.
기독교 세계관, 신학과 교회의 시스템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지식만 가득한 니고데모형 신자에게 한마디 하신다.
“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3.
니고데모는 큰 결심을 하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전도집회를 참석해보면 결단을 촉구하는 시간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결단하라! 당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내가 결단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전도자는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흉내를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신천지에 속한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빠른 시간 내 교회 중진이 되기는 아주 쉽다고 말한다.
교회 와서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활동에 빠지지 않고, 큰 소리로 기도하면 사람들은 금방 속는다.
물론 신천지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지만, 우리 주변에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기독교가 좋은 것으로 판단하여 마음에 큰 결심을 하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그의 결정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라 결단한 대로 교회에서도 성실하게 봉사하고 신앙생활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교인들은 좋아하고 칭찬한다.
그러면 성실한 그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정말 자신이 결단하면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
교회에 나오면 크리스천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수님께 찾아와 겸손히 머리 숙이면, 크리스천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내가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크리스천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새 출생은 곧 새 창조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듯이 그의 영혼이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전혀 없을까?
사실 니고데모의 태도와 자세는 나쁘다 할 수 없다.
그가 비록 불완전한 동기와 접근 방식으로 주님 앞에 나왔지만, 주님은 기꺼이 그를 바로 잡아주셨다.
우리의 경우도 비슷하다.
자신은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하지만, 잘못된 근거에서 출발할 때가 있다.
집을 세웠다고 생각했는데 기초가 모래 위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은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특별히 니고데모처럼 자신을 경건한 신앙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한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6:3)
로이드존스 "요한복음 3장 강해"의 두번째 설교 '핵심토대'를 읽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