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 TV 프로그램은 정말 볼 것이 없다. 집중해서 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TV는 켜놓았다. TV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 지나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여행한 이야기, 읽었던 책 이야기, 자신에게 큰 감명을 준 스승 이야기, 조카들 이야기, 주애가 쓴 논문 이야기, 아무 관련 없는 이야기들이 순간순간 주제를 바꿔가며 쏟아져 나와도 아무도 당황하지 않고 웃고 떠든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모두 마음 문 열고 받아주는 것이 가족이다.
“오빠! 저 아이가 우리 반 아이야!”
학교 선생을 하는 동생의 소리에 모두 TV를 보았다. 걸그룹이 되고 싶어 하는 101명의 소녀 연습생들이 경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어린 소녀들이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하며 경쟁하는 프로그램이다. 사회자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냉정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우리 프로그램은 약한 모습, 욕심이 없는 모습, 싸울 의지가 없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럴 거면 빠져라!"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호전적 태도는 경쟁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미덕이다. 일등에서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사회에서는 화합과 협력은 오히려 장애요소가 될 뿐이다. 함께 연습하면서 친구가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어하는지 다 보았지만, 경쟁 앞에서 그 모든 인간적 감정은 힘겹게 삼켜야 한다. 친한 친구를 밟아야만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이 프로그램은 잔인하다.
동생의 제자는 참 밝은 아이였다. 반에서 모든 학생에게 사랑받는 어여쁜 아이였다. 그 아이가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칭찬을 받고 자랐을까? 보지 못했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서 주는 모든 긍정적인 신호가 아이에게는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듯하였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점점 변하여갔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아니 다른 친구와 싸워 이기기 위하여 없던 호전성을 키워야 했다.
니체는 그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다. “적을 갖되,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걸맞은 적을 찾아내어 일전을 벌여야 한다.” 니체는 치열한 싸움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더욱 강해지라고 권면한다.
몇 년 전 카이스트 학생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학교는 학점에 따라 등록금을 다르게 책정하는 징벌적 등록금 제도를 운용하였다. 학생을 절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평가하여 하위권 학생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상대평가에는 반드시 뒤에 서는 학생이 생기기 마련이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줄세우기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이다. 집안의 축하와 기대를 받고 입학한 학생에게 이것은 너무나 가혹한 경쟁체제였다. 그러나 총장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였다.
“경쟁 사회는 불필요하고 나약한 자는 걸러내는 법이다."
"그런 나약한 자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살 수 없다.”
현대 사회는 폭력적 경쟁사회다. 나에게 손해가 되면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고,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어제의 원수와도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 이 싸움터에는 도덕도 윤리도 필요 없다. 철저하게 이익 위주의 사회다. 이것이 돈의 논리이고, 경쟁의 논리이고, 적자생존을 말하는 진화론의 논리다.
어린 소녀들이 치열한 경쟁 프로그램에서 힘겹게 버티는 모습이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소녀는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아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아이는 변하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도 없이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평가는 잔혹하였고, 그 아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어야 했던 악플은 아이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어린 소녀는 우울증에 빠졌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배웠던 폭력성은 곧 자기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 폭력은 외부로만 향하지 않는다.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 세상이 주는 교훈은 좀 더 강해지라는 의미로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찾으라고 말한다. 아이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평가절하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넌 패배자야!. 넌 실패자야!'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말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을까? 치열한 경쟁 사회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지혜가 호전성과 폭력성뿐일까? 서로 협력하고 서로 아껴주며 사랑하는 방법으로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일까? 뛰어난 능력을 갖춘 한 사람보다 못나고 부족하지만, 함께 하는 팀워크가 훨씬 큰 성과를 나타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남과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는 세상 같아 보이지만 사실 다른 사람을 품어 안고 보듬어 주는 사람이 승리하는 경우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여기저기 피 튀기는 싸움이 치열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누군가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누군가 나를 이해해주고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있는 모습 그대로, 실패한 모습 그대로, 야단치지 않고 그냥 품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단 한 사람의 독불장군이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가슴으로 품어주는 사람이 세상을 차지하는 지혜도 배워가는 사회였으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