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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17. 2016

패북인가? 패배인가?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이사온 나는 어리숙하였다. 경상도 점촌에서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고 들로 산으로 강으로 뛰어나갔다. 자연은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누가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내가 서울에 올라온 후로 우리에 갇힌 것 같았다. 학교에 가도 재미가 없고, 집에 와도 별 신통한 것이 없었다. 삭막하고 팍팍하였다. 그런 내가 공부를 잘하였을 리 없지만, 아버지는 나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나 보다. 혼자 힘으로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졸업하여 공직자가 된 외삼촌에게 내 자랑을 하였다.

“큰놈이 공부를 잘하는데 아무래도 서울대학에 들어갈 것 같아!”

“매형 그러면 제가 테스트해보겠습니다. 한번 데려오세요.”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외삼촌 앞에 끌려갔다. 외삼촌은 대뜸 한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敗北

“무슨 자인지 읽어봐라!”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난 그때까지 한자를 배운 적이 없었다. 다만 아버님이 붓글씨 쓰는 것을 흉내 낸다고 가끔 신문지에다 한자를 끄적거린 것이 전부였다. “패북” 난 자신 있게 읽었다. 외삼촌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하였다.

“야! 이놈아 이게 패북이냐? 패배지!”

“이놈 서울대 가기는 틀렸어요.”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고 나를 호랑이 같은 외삼촌에게 학교 공부를 봐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날 부터 방과 후 난 외삼촌 집에 가서 엄한 교육을 받았다. 때로 밤늦은 시간에 팬티 바람으로 마당을 뛰는 벌을 받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패배. 난 그날 내 인생의 쓰라린 패배를 처음 맛보았다.


중국 북방과 남방이 싸우면, 언제나 남방이 북방에 졌다. 북쪽은 기후적으로도 몹시 춥고 농사짓기도 열악하였다. 몽골, 돌궐, 거란, 여진, 말갈 등 오랑캐가 늘 침범을 해오는 중국의 북방은 거친 환경에서 단련된 강인함이 있었다. 반면 풍부한 수량을 갖춘 남방의 양쯔 강 좌우는 천혜의 곡창지대였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남방 사람은 언제나 여유 있고 넉넉하였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애를 쓰던 북방과 풍요 가운데 여유를 즐기던 남방이 싸우면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북방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남방 사람은 敗北(패북)이라 쓰고 ‘패배’라 읽었다. 이런 사연을 알 도리가 없는 난 아무 생각없이 패북이라 읽고 외삼촌에게 패배자로 낙인찍혔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이 한문을 바로 읽지 못했다고 단정 지어 ‘넌 안돼!”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아직 한문도 배우지 못하였을 텐데 어떻게 이걸 읽을 수 있니 하고 격려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사회에서 패배자로 낙인 찍혔다고 영원히 패배자로 사는 법은 없다. 북방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싸우는데 이골이 난 족속이라면, 남방은 여유 가운데서 자유로움과 창조적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북방이 강하다면 남방은 유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 정권은 상해파를 중심으로 한 남방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싸움을 잘하고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패배에서 찾는다. “우리는 이집트 바로의 종이었다.” 전 세계 어느 민족도 이처럼 굴욕적인 패배의 역사로 민족사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바로에게서 해방을 쟁취했다고 쓰지 않고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쓴다. 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밝히고 있다. 유대인은 패배에 익숙한 민족이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존속할 수 없는 나라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 동안 부평초처럼 떠돌며 방황하여도 결국에는 나라를 다시 건설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유대인은 실패나 패배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재산을 다 빼앗기고 고향 땅에서 쫓겨나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는 신앙을 그들은 가졌다.


대한민국 자살률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들 가운데 12년 연속 1등을 기록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해 약 14,000명이 자살을 하고 하루 평균 약 38명이 자살한다. 남자 자살률은 43.2이고 여자는 17.8로서 OECD 평균자살률의 2배가 넘는다. 사람들은 사업의 실패, 인간관계의 실패 등을 이유로 자살한다. 그들은 실패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실패로 규정한 것을 거꾸로 해석한다. 십자가는 누가 보아도 실패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그러한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의 삶을 바꾸신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죽이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여셨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고통이 따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삶을 고쳐주신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전1:27-28)

패배하면 어떻고, 실패하면 어떤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정도로 친구가 없으면 어떻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거꾸러지면 어떤가. 하나님은 가치 전복자이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버림받은 자 같으나 가치 있는 자요, 낮은 자 같으나 높은 자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난 패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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