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정'을 보고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결정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진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어떻게 올리겠습니까?” 의열단을 다룬 영화 밀정에서 정채산은 일본 경찰 이정출에게 일본의 앞잡이로 살지 말고 민족 앞에서 떳떳한 사람으로 이름으로 남기라고 설득하였다. 의열단은 항일 무력 운동 단체로서 요인 암살, 관공서 폭파 등 극렬한 활동을 하였다. 사실 항일 독립운동은 극렬 테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좌진 장군처럼 정식 군대를 통하여 전쟁하는 방법도 있고,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민족 계몽 운동을 통하여 독립을 힘쓸 수도 있다. 의열단처럼 극렬한 테러를 하는 게 반드시 정답이라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의열단의 행위를 나름 여러모로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훌륭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의열단과 같은 단체가 있었다. 유대의 율법을 수호하는데 열심이며 민족 독립을 위하여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열심당(Zealots)이다. 열심당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이들이 로마의 통치에 항거한 근본 동기는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이었다. 열심당은 유대인들에게는 명예로운 칭호였다. 모세 당시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 차고 넘쳐서 바알브올의 배교 사건 때 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 이후 유대인은 여호와를 향한 열심을 매우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열심당 시몬이 있었으며, 가롯 유다도 열심당 중 한 명이라고 보는 학자가 더러 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물론 율법에 대한 순수한 열심만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열심이 지나쳐서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열심당은 로마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순교자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경험한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로마에 대하여 테러를 가하는 열심당은 용기있고 신앙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단지 유대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 로마의 포로가 된 후 변절한 요세푸스는 열심당에 대하여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쓴 유대 고대사에서 열심당을 자객(sicarii)라고 불렀다. 그 뜻은 강도나 산적이나 암살단이란 의미로 유대인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퇴색시켰다.
성경은 열심당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조금 기록하였다. 그중에 누가복음 13:1의 사건이 열심당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개역 성경은 의미가 조금 불분명하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 중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에게서 피를 빼내어 성전의 제물에다 섞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혹간 있다. 그러나 그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다. 다른 번역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공동번역 눅13:1)
“바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표준새번역 눅13:1)
눅13:1의 사건은 빌라도가 갈릴리 유대인을 잔혹하게 탄압한 사건을 말한다. 영국의 주석가 바클레이는 요세푸스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 본문을 해석한다. ** 빌라도의 직함은 ‘프라이펙투스(Praefectus)’로서 로마의 야전 사령관을 뜻한다. 그는 로마의 충직한 군인으로서 제국의 종교인 황제 숭배를 신봉하는 자이며 황제를 대신하여 유대 식민지를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총독이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는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빌라도는 유대인이 자기 종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무력으로 유대를 다스리려 하였다. 그는 군대를 몰고 예루살렘으로 시찰을 갔다. 지금까지 로마의 총독과 군인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종교를 존중하여 황제의 형상이 없는 깃발을 들고 갔다. 그러나 빌라도는 달랐다. 그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상징물을 들고 행진해 들어가 성전에 세워놓았다.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이라 하여 데모를 하였다. 빌라도가 머무는 가이사랴로 찾아가 6일간 시위를 하였다.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듣겠다면서 극장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완전무장한 로마 군인을 배치해 놓고 창으로 그들을 위협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빌라도의 처사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모두 목을 길게 빼고 엎드렸다. 빌라도는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빌라도의 야만적인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성전에 낸 헌금을 빼돌려서 예루살렘에 수도 건설 사업을 벌였다. 유대 군중은 성전 헌금을 빼돌린 빌라도에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빌라도는 이번에는 본때를 보이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부하들에게 사복을 입혀 유대인들 속에 잠입한 뒤 단검으로 사정없이 찔러 죽였다. 누가 봐도 빌라도의 짓이 뻔하건만 빌라도는 모르는 일이라 발뺌하였다. 이 일은 예루살렘의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은 저항정신이 유달리 강했던 갈릴리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왔다가 빌라도의 만행을 보고 격렬히 데모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이었고, 그들의 흘린 피는 희생 제물과 뒤섞이게 되었다. 모든 유대인은 이러한 빌라도의 만행에 비분강개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빌라도의 만행은 계속됐다. 그는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지은 거주지의 벽에 로마 신들의 이름을 새긴 방패들을 붙였다. 빌라도의 계속된 폭정을 전해 들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 방패를 제거하라고 직접 빌라도에게 명령할 정도였다. 빌라도는 유대를 다스리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집 세고 영악하며 무자비한 총독이었다.***
누가복음 13장 1절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말씀이다. 이제 다시 이 본문을 읽어보자.
“바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표준새번역 눅13:1)
이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러한 사실을 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마치 일제의 야비한 경찰이 비폭력 만세운동을 하는 선량한 백성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처형한 사건을 보고하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진정 애국자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 분개해야 마땅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해야 하는가?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언제입니까?’ 질문하는 심정으로 이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진정 유대인이라면 이러한 반응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였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2,3)
예수님의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야말로 어이 상실이 아니었을까?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말이 되는가?
게다가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건을 언급하신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4-5)
예수님은 로마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사람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우연히 죽은 사람을 같이 취급하였다. 유대의 율법을 지키려고 로마에 항거하다 죽은 것은 정말 역사에 기록될 만큼 의미 있는 사건이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것은 그야말로 우연히 발생한 사고일 뿐이다. 둘은 결코 비교 대상이 아님을 의식 있는 유대인이라면, 그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지 않으면, 다 망할 것이라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일까? 역사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정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외치는 사람들처럼 무조건 ‘회개 하라.’를 외치신 것일까? 나는 예수님이 그 정도로 역사의식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이스라엘의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을 예수님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누구라도 욕할 수 있는 대상을 함께 욕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예수님도 보통 유대인처럼 로마를 욕하고, 비분강개하고, 분노를 터트릴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유대인에게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급부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화살은 의외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5)
예수님의 진짜 관심은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 그는 약자였던 유대인, 언제나 핍박받고 설움 받고 고통받는 유대인, 함께 울어주고 싶은 유대인, 같은 동포 유대인을 향하고 있다. 소외당하고, 억눌림 당하고, 괴롭힘 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그게 극렬한 테러든 암살이든 모든 것이 다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눅13:3,5)
이건 굉장한 용기를 가져야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분명하게 약자인 유대인을 향한 말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로마의 만행과 악행은 용서받을 길이 딱 한 길밖에 없다. 회개밖에 없다. 그들은 명백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의 죄를 어찌 다 씻어 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회개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런데 회개는 압제하고, 고통을 주고, 잔인무도하게 폭정을 휘두르는 강자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위로받고 싶은 약자들,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유대인들 바로 너희들도 회개해야만 살 수 있다. 민족 독립운동한다고 해서 회개가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설움 받는다고 해서 회개를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약자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약자를 향하여 회개를 말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강자도 구원하고 싶지만, 누구보다도 약자를 구원하고 싶어 하신다. 그러기에 지금 설움 받으면서 비분강개하는 약자들인 유대인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이왕이면 너희가 먼저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진정 구원자시다.
주(註)
* 성경 바로 알기 / 민영진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0년 / 89쪽 - 많은 한국 독자들은 이 부분을 빌라도가 희생제물에 갈릴리 사람의 피를 섞은 것으로 오독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학살임을 언급하였다.
**성서주석 시리즈 4 누가복음 / 바클레이 지음 / 황장욱 옮김 / 기독교문사 / 1978년 / 247쪽 이하
요세푸스 2 (유대고대사) / 요세푸스 지음 / 김지찬 옮김 / 생명의 말씀사 / 1988년 / 505~506쪽
*** 인간의 위대한 질문 / 배철현 지음 / 21세기 북스 / 2015년 / 177~180쪽
****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 케네스 E. 베일리 지음 /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 80쪽 - 실지로 지금까지 성경학자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유대인들의 의식구조 속에 죽은 자는 분명 죄가 있어서 죽었으니 무슨 죄로 죽었는가를 묻는 것처럼 해석하고, 예수님도 그에 따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케네스 베일리는 그 부분에서 유대인의 정서와 문화를 분명하게 읽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은 억눌림 당하는 약자들의 회개를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