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농사밖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농사를 크게 지으면서 제법 부유했음에도 자녀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농사꾼이 농사짓는 데 어려움 없도록 국문이나 떼면 그만이지 공부해서 무엇하느냐 하셨다. 하나뿐인 딸이라고 더 공부시킬 리 만무하였다. 어머니는 외동딸이었다. 국문을 겨우 뗀 어머니는 매일같이 성경을 읽으면서 일평생을 보내셨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동네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편지가 오면 글 읽는 사람에게 가서 읽어달라고 부탁하였다.
2,000년 전 로마 시대 문서는 지도자 계층에서만 소통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로마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교육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 지식인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다. 로마 귀족은 자기 자녀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그리스 지식인을 채용하였다. 이집트를 정벌한 후 로마인은 파피루스를 접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종교적인 문서는 아마포에, 비종교적인 문서는 나무나 동으로 된 판(tabulae)에 새겼다. 이 두 가지 재료는 긴 내용이나 문학적인 문서를 쓰고 읽기에 불편하였다. 파피루스를 알게 된 후 출판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로마인은 낱장의 파피루스를 풀로 붙여 약 6-10m 길이의 두루마리(volumen)로 만들었다. 너비는 25-35cm쯤 되었는데 문서를 읽어가며 두루마리를 쉽게 펴거나 감기 위해 그 끝에 나무막대기(umblicus)를 달았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노예들이 필경사(notarius)가 되어 글을 썼는데 알아보기 쉽고 예쁘게 쓰인 것은 비싼 값에 팔렸다.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책을 읽고 글 쓰는 교육이 유행처럼 퍼져 나갔다. 이제는 명문 귀족뿐 아니라 자유시민도 글을 배워 직업 공무원이 되었다. 그래도 글 읽기는 만만치 않았다. 알아보기 쉽게 대문자로 쓰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필기체 소문자로 쓴 것은 읽기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로마 귀족들은 글을 읽는 낭독자(lecctores)를 고용하였다. * 그러나 일반 서민이나 이방 민족은 글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인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여기서 골로새 교회의 배경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골로새서 주석을 쓴 라이트푸트(J.B. Lightfoot)는 “골로새는 그리 크거나 중요한 도시는 아니어서 아마 이곳은 바울이 편지를 쓴 도시들 가운데 가장 의미가 작은 도시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 골로새에 유대인들이 살긴 하였지만, 교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방인이었다. (골1:27, 2:13, 3:11) 사실 바울은 골로새에 가본 적이 없다.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에바브라디도에 의해 세워진 골로새 교회 소식을 전해 듣고 골로새서를 썼다. 그러니까 지금 골로새 교인은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였다. 유대인처럼 구약에 대한 선이해도 없는 그야말로 생짜 배기였다. 우리처럼 3, 4대 예수를 믿은 사람도 없었고, 10년 20년 신앙생활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바울은 3장 10절에서 이미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임을 천명하였다.
골로새 교인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식인층인지는 잘 모르겠다. 바울은 처음 믿는 골로새 교인에게 지적인 면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여서 그 말씀이 가슴 속에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였다. 초대 교회는 말씀 교육에 집중하였다. 단순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지성 체계에 변화를 강조하였다. 말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였다.
요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 수준을 바울은 골로새 교인에게 요구하였다. 전도할 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경을 잘 모르지만, 우리 목사님 설교 잘하시니까 그냥 한번 와서 들어보라.” 10년 20년 신앙생활 하였어도 말씀으로 지식 체계가 바뀌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할 정도로 자란 그리스도인을 찾기 매우 힘들다. 주일날 예배당에 나가서 설교 한번 듣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다한 듯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생각체계를 완전히 바꾼 사람들이다. 세상을 해석하는 성경적인 식견을 갖춘 사람이 초대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의 편지 끝부분에 보면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평신도 사역자들의 이름이 있다. 너무 많아서 그 이름을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 주변에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을 갖춘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시사와 정치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사람, 경제 상황이나 주식 시황을 살피면서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 연예 동정을 꿰뚫고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자 자기 생각과 견해를 밝히느라 때로 말싸움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을 바라보는 성경적 식견으로 탁월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렵다. 말씀의 지혜가 가슴까지 풍성하여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사람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바울이 처음 예수를 믿는 이방의 골로새인들에게 말씀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고 말씀의 지혜와 지식으로 생각체계를 완전히 바꾸어 세상을 바라보는 성경적 식견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면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이 로마를 정복한 데는 물질의 힘이나 권력의 힘이나 숫자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달랐다.
그 당시 세상이 살기 좋은 태평성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사회적 불이익을 받거나 핍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초기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찬송하고 감사하였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골로새 교인은 세상과 환경을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그들은 말씀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었고, 말씀으로 생각체계를 바꾸었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와 찬송이 나왔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때가 없다. 요즘 88만 원 세대라는 말을 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에 취직하기 정말 어려운 세상이다. 사업하시는 분들에게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좋다. 편하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모두 “살기 정말 힘들다. 사업하기 힘들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이다. 목사님은 우리가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모르실 거다.” 말한다. 나는 그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돌이켜 보면 언제 편하고 좋은 때가 있었는가? 없었다. 우리 조부모들이 살던 일제시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땐 자기가 힘들여 농사지은 것도 이유 없이 빼앗기던 시대였다. 우리 부모들이 살던 6.25와 전쟁 후 경제 재건의 시기는 어떠했나? 그 당시 대부분 집안의 큰 누나들은 공장에서 밤이 맞도록 일하여 돈을 벌어 고향 집에 보내었다. 자기를 위하여 쓸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동생 뒷바라지하던 누이들이 많았다. 힘들고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목사도 힘들다. 매일같이 성경 연구하여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교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시어머니 같다. 일이 힘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관계가 더욱 힘들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이 험한 세상에서 “죽겠다. 힘들다. 괴롭다.” 아우성이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은 감사하고 기뻐하였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에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였다. 환경과 여건이 좋아서 찬송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을 보는 성경적 식견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당시 불신자들이 초대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가만 보면 자신들처럼 살기 힘들고 어려운 게 분명한데 어쩌면 저렇게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하였다.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말씀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그리고 지식 체계, 생각 체계를 성경의 시각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을 보고 해석하는 눈을 가졌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을 보고 불신자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요즘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세상을 성경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는 힘이 없기에 고난 앞에 아무 대답할 말도 없이 무릎 꿇고 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친다. 불신자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불신자들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생활을 한다. 그 생활이 힘들든 편하든 어쨌든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그냥 생활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다. 신앙적인 안목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이다. 말씀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다. 말씀의 지혜가 가슴까지 풍성하여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사람이다.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떠들 때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식견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인생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말씀 교육에 힘썼던 이유는 그것만이 종교와 사회와 우리의 삶을 개혁시키는 원동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주(註)
*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 / 한스 요아힘 그립 지음 / 노선정 옮김 / 이른아침 / 2006년 / 190쪽~258쪽 참조
** 골로새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 / 한천설 씀 / 에베소서 골로새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두란노 HOW주석 / 2009년 / 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