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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4. 2016

지루한 책, 재미있는 책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풍미하는 시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계몽과 도덕을 거부하고 합리주의로 위장된 모든 억압을 깨뜨리는 데 주력한다. 그들은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서 전체성과 보편성을 추구한 정치, 종교, 예술은 모두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 진리를 거부하며 불확실성, 모순, 단절,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포스트모던적 시각은 그래서 매우 혼란스럽고 반동적이다. 그런데 정말 인류에게 보편 진리는 없는 것일까? 시대를 초월하고 문화를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진리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서점 나들이를 한다.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신간을 살피면서 보물찾기하듯이 좋은 책을 찾는 것은 나의 취미생활 중 하나다. 그런데 서가를 기웃거리면서 아쉬운 것은 내가 찾는 책을 찾지 못할 때다. 직원에게 물어보면, 이미 다 팔렸거나 아예 진열해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라도 주문하면 가져다 놓겠다고 친절히 말하지만, 못내 아쉽기만 하다. 때로 너무 좋은 책들이 서가에 한 번 꽂혀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수많은 책 중에 스테디셀러가 되는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다. 일 년에 고작 십여 권 정도이다. 나도 책 한 권 출판했지만 잘 팔리지 않아서 출판사에 미안할 따름이다. 스테디셀러는 장기간 꾸준히 팔리는 책으로서 그 당시 사회 사람에게 널리 사랑받는 책을 뜻한다.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서 사랑받는 책을 우리는 클래식(고전)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온갖 비평과 비판을 이겨내고 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도 달라지고 표현법도 달라졌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생각과 사상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고전이 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 책이기에 읽기 조금 힘들어도 고전은 분명 시대를 초월한 깊은 울림이 있기에 가능하면 읽으려고 노력한다. 


성경을 고전이라 평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성경은 오늘날 거의 사용하지 않는 히브리어와 고대 그리스어로 쓰였다. 물경 2000년 전에 쓰였기에 문화와 풍습, 지리와 기후 모든 것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성경은 그리스 문화와 더불어 서구 유럽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심축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이 동양 문화에서 나온 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서양 문화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자신의 문화와 종교 즉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사람들은 성경을 싫어하고 미워하였다. 마치 제국주의 앞잡이 같은 책으로 느끼는 듯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식민지 백성인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폭력과 착취를 일삼는 그들의 책이 아니라 바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신들의 책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들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서양의 종교가 아닌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성경은 시대와 민족, 인종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책이다. 보편 진리는 없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소리치지만 난 절대 믿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일 진리는 반드시 있다. 


나는 일평생 수많은 책을 읽어보았지만, 성경만큼 재미있고 의미가 풍성한 책을 보지 못하였다. 읽고 또 읽어도 이보다 더 유익한 책은 없다. 이 책은 그 어떤 사람의 손에 들려주어도 감동과 유익을 주는 책이다. 성경이야말로 보편진리를 가득 담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문제는 온 세계 사람이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하는 이 책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 생각 없이 관습에 젖어 남이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여 읊조리는 사람이다. 자기 깨달음은 없고 오직 주문 외우듯 배운 것을 그대로 전수하는 데만 급급한 사람이다. 시대를 울리고 세상을 울리고 사람을 울리는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하면, 성경은 곧 수면제로 바뀐다. 


성경은 언제나 새롭게 읽혀야 한다. 과거의 독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암송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이 깨달은 것과 내가 깨달은 것이 다르고, 다른 사람의 해석과 나의 해석이 다른 법이다. 물론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주었다. 중세 가톨릭이 성경을 금서로 정하여 아무나 읽지 못하고 오직 교회만 성경 해석의 권한을 가지게 했던 것에 비하면 종교개혁자들의 결정은 매우 위험하기도 한 결정이었다. 이단과 오류가 발생할 줄 예상하였겠지만, 성경 해석의 다양성은 개신교의 상징과도 같다. 그들은 성경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믿고 과감하게 각 개인에게 성경을 들려주었다. 


알고 보면 유대교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종교다. 구약성경 해석을 모아놓은 탈무드에 보면 시대마다 그 해석이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해석을 그대로 다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가 아니라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편협되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남을 비판하기에 앞섰지만,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전부는 아니다. 


유대교 안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파, 광야에서 은거하며 수도 생활하는 에센파, 독립을 위하여 극렬한 항쟁을 일삼는 열심당, 성경을 온전히 유지하는데 힘썼던 서기관들, 권력과 함께 손잡고 정치를 하던 장로들과 산헤드린 공의회원들, 메시아를 기다리던 메시아파, 율법의 잣대로 남을 사정없이 비판하던 바리새파 등이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이 모든 분파를 한데 아우르고 있었다. 그만큼 포용력을 갖춘 종교도 드물다. 


기독교 초기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 이런 포용력을 보이며 나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기독교 통일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다른 생각은 발붙일 수 없도록 하였다. 종교개혁은 그러한 일당 독재체제를 깨뜨린 혁명이었다. 성경 해석의 다양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종교개혁사를 읽어보면 성경 해석의 꽃이 활짝 만개하는 것을 본다.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성경이 이렇게 풍성한 뜻을 담고 있는 책이구나 발견하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마치 편협한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경직되어 한 가지 해석만 고집하는 듯하다. 전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목에 깁스하여 앞만 똑바로 보고 가라는 듯하다. 여행의 참 재미는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아닌가? 조금 곁길로 가면 어떤가? 그러면서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큰 틀에서 잘못되지 않았다면, 조금 여유 있게 지켜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성경은 결코 고리타분한 책이 아니다. 날마다 신선한 깨달음과 새로운 안목을 열어 주는 책이다.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시선으로만 성경을 보지 말고 열린 마음과 열린 눈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언제든 우리에게 기쁜 마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경을 베개로 삼지 말고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망치로 삼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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