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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4. 2016

초기 기독교의 발흥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한 역사서다. 역사서이기에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대 기독교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초대 기독교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들은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였을까?

워싱톤 대학교 사회학 및 비교종교학 교수인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초기 기독교의 발흥과 당시 사회에 대해 연구하였다. 비록 신약학자나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사회학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기독교의 발흥’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그는 존 로플랜드 교수와 함께 신흥 종교가 처음 전파할 때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마침내 한 모델을 발견하였다. 1959년 1월 이화여대 종교학 교수였던 김영운이라는 여성이 몇 명의 젊은 추종자들과 함께 통일교를 전파하려고 미국 오리건주에 왔다. 첫해 김 씨는 대부분 시간을 통일교를 알리는 보도자료를 만들거나,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통일교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아가 강연하였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통일교가 전파되지 않았다. 


최초의 개종자는 오리건에 사는 옛 친구나 일가친척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친구의 친구로 퍼져나갔다. 불시에 낯선 집을 방문하여 전도할 때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을 통하여 다른 아는 사람을 접촉하고 전도할 때는 성공률이 50%에 달하였다. 스타크 교수는 사람들이 왜 동양의 문선명을 교주로 믿는지 궁금하였다. 처음 개종한 사람은 대부분 어느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다니더라도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에 통일교를 접하고 빠져들게 되었다.


스타크 교수는 통일교의 전파 모습을 연구하면서 처음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퍼져나갈 때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다.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 사형을 당하여 죽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전파할 때 초대 기독교인은 통일교인 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아무도 선뜻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믿게 된 것은 순전히 관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공동체성을 느끼면서 기독교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초기 기독교는 그렇게 전파되었을 것이다. *


초기 기독교는 너무나 소수였다. 사도행전 4:4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5천 명이라고 하였지만, 많은 학자는 이것을 정확한 숫자로 받아들이기보다 처음 기독교가 굉장히 강력하게 전파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숫자를 기록하였을 것으로 해석한다. 고대 유대인은 현대인처럼 정확한 숫자개념을 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썼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많게 잡으면 2만 명 적게 잡으면 만 명으로 추산한다. 성경의 숫자를 현대 숫자 개념으로 생각하면, 예루살렘 기독교는 무려 25%~50%가 되는데 이것은 사도행전의 상황을 생각해 보아도 맞지 않는 통계다.  **


분명한 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숫자는 미미하였음이 틀림없다. 스타크 교수는 AD40년 기독교인의 총 숫자를 천 명으로 추산하였다. 그리고 매년 40%씩 성장한다고 할 때 AD 100년에 7,530명이고, AD 200년이 되면 217,795명이며 AD 300년에는 6,299,832명이다. 당시 로마 제국 전체 인구를 6천만 명으로 추산한다면 AD300년에 가서 10%가 되었다. 그의 추산은 어디까지나 추산이지 정확성은 없다. 그렇지만, 그의 통계는 나름대로 초대 기독교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처음 기독교는 숫자상으로 미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반대와 핍박도 있었다. 유대교는 처음 기독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랍비 가말리엘은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하였다.(행5:38-39) 그렇지만, 기독교는 점점 성장하였고, 유대의 디아스포라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마침내 유대교는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고 방해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따라다니며 고소하고 때로 폭력도 행사하였다. 어디 바울뿐이겠는가? 초대 기독교 전체가 다 동일한 핍박을 받았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 제국 역시 처음에는 기독교를 주시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한 작은 도시에서 발흥한 기독교가 제국에 영향을 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들이 로마 제국 전체로 조금씩 퍼져나가면서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황제마다 상황은 달랐지만,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헬라의 문화 역시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 그리스가 로마에 멸망하였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로마 제국 전체로 퍼져나갔고, 동시에 헬라 문화도 퍼져나갔다. 기독교는 어디를 가든 헬라 사상과 대결을 해야 했다. 헬라 사상은 당시 첨단을 달리는 최고급 문화였다. 


이러한 상황에 기독교는 너무나 연약하였다. 돈도 없고, 조직도 없고, 사람도 없고, 방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답답할 뿐이었다. 


그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행전을 쓰면서 초대 기독교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역사의 주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역사는 로마제국의 황제나 헬라의 사상과 문화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믿음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곳곳에 성령님의 역사 하심을 기록하였다. 

오순절 성령강림(2:1-13)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함(4:23-31)

성령을 속이는 자를 징계(5:1-11)

성령이 사마리아인에게 임함(8:14~17)

성령이 빌립을 인도함(8:29)

성령이 고넬료 가족에 임함(10:44-48)

성령이 바울과 바나바를 부르심(13:1-4)

성령이 예루살렘 총회를 인도하심(15:28)

성령이 바울의 역사를 인도하심(16:6-7)

성령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임함(19:1-6)

성령이 바울을 인도하심(20:22-23, 21:11)

성령이 교회의 감독을 세우심(20:28)


두 번째로 누가는 환상과 비전과 꿈을 가졌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꿈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비록 지금은 변방의 작은 도시 예루살렘에서 아주 작고 보잘것없이 시작하지만, 이제 곧 가을 들판에 들불 번져 나가듯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환상과 꿈을 가졌다. 그것은 막연한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었고, 역사하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일제강점기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 대표 33인 중 많은 사람이 변절하였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남강 이승훈 선생 등 정말 훌륭한 분들이 끝내 변절하였다. 왜 변절하였을까? 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이 해방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선은 썩을 대로 썩어 버렸고, 왕정은 무너졌고, 군대 조직과 행정 조직도 모두 와해되었다. 조선은 아무런 힘도 없는데 일본은 아시아를 평정하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였다. 비전과 꿈과 믿음을 잃어버리니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 해도 변절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만해 한용운이나 이필주 목사님 같은 분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들은 생각했다. 일본이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는가?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몽골이 수십 년을 지배해도 다시 독립한 나라 아닌가? 이 민족은 절대 누군가의 지배 속에 놓일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해방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누가는 바로 그 믿음, 비전, 환상을 심어주고자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하였다.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초대 기독교인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았다. 끝까지 버텼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요즘 우리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기독교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가? 세속의 문화 앞에 무릎 꿇고, 불신자들 앞에 무릎 꿇지 않는가? 기왕 무릎 꿇을 거라면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었으면 한다. 


주(註)

* 기독교의 발흥 / 로드니 스타크 지음 / 손현선 옮김 / 좋은 씨앗 / 2016년 / 35~43쪽

** 위의 책 / 20~21쪽

*** 위의 책 /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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