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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17. 2016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일까?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일까? 시카고대학의 노만 페린(Norman Perrin)교수는 누가복음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사도행전을 “교회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하였다. * 그는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였음을 말한다. 실제로 사도행전에는 성령이란 말을 70회나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주권적 속성이 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종속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도권을 가지고 일을 계획하시고 이끄신다. 구약시대는 성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고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보조적으로 역사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만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만 하면 되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들은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외면하면 예루살렘, 성전이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성자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보조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훈련받으며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아직 여러모로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지만,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제 교회 시대가 열리고 성령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실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불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사도행전을 가만 살펴보면 성령님이 사도행전 결론 부에 임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목표와 지향점은 성령 받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성령만 받으면 만사형통이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듯이 말한다. 그래서 성령 받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성령님의 오심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서두에 성령님의 오심을 기록함에는 뜻이 있다. 성령님의 오심은 결론이나 목표가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역사가 열려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령님의 오심으로 시작하였고,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진행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본문을 잘 살펴보면 처음에 조건문이 나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이란 말을 사용하여서 이건 필수조건임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성령이 아니시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다고 바울이 말한 바가 있다. '성령이 임하시면'을 '오순절 성령 충만을 뜻하느냐?' 아니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를 주라 시인할 믿음으로 해석할 것이냐?'를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나느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만큼 학문적 실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다만 나는 양쪽이 다 일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도행전과 교회 역사를 읽어나갈 수도 있겠다 생각하였다. 이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니 굳이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 한다. 각자 신학과 이해가 다르기에 각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았으면 한다. 


문제는 그 뒤에 등장하는 서술문이다. 주어를 찾아보자. 명백히 주어는 “너희가”이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끝까지 복음의 전파와 기독교의 부흥의 엄청난 사명을 너희가 완수하라는 뜻이다. 주도권을 성령 하나님이 가지신 줄 알았더니 아니다. 이 엄청난 역사의 주도권을 바로 우리에게 주셨다. 이건 역사의 주권을 가지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양보요 모험이요 결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구원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부터 이런 계획을 세우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하신 자녀들에게 세계 복음화의 엄청난 주도권을 다 넘겨주셨다. 물론 필수조건으로 ‘성령이 임하시면’을 전제하긴 했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대대대...대형사건이다.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인듯 싶지만, 분명하게 사도행전이다. 사도들이 주도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행전이다. 물론 사도만이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이끌어간 것은 아니다. 바울이 편지 끝부분에 거론한 수많은 평신도, 때로 무명의 평신도들이 세운 교회를 생각하면 사도행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다. 물론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의 역사를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다. 선교팀을 처음 꾸렸던 바나바나 아볼로나 다른 사도들의 이야기는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니 평신도들이나 무명의 전도자들 이야기까지 다 기록하려면 잉크와 종이가 턱없이 부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 모든 성도가 주도적으로 세계 복음화의 사명, 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힘썼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교회 역사는 사람(믿는 성도)의 역사다. 문제는 성령님과 협력하며 일을 진행할 때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볼 수 있다. 사도들이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뒤에서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기독교는 힘이 있었고, 영향력이 있었고, 복음은 흥왕하였다. 비록 수도 적고, 건물이나 조직이 형편없다 할지라도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는 사람이 있을 때 교회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성령님과 파트너쉽을 바로 유지하기만 하면, 어디든 어느시대든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재현되었다. 


그러나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저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되었지 하면서 인간 마음대로 교회 일을 주도하고 이끌어갈 때면, 어김없이 인간 냄새가 나고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가지 기조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반복된다. 


지금 대한민국 교회는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님은 그저 명분으로만 말하고 인간 하고 싶은 대로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가?


만일 인간 냄새만 풀풀 풍기는 기독교라면 당장에 우리는 필수 조건문을 제대로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고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때는 제 멋대로 기독교를 이끌어 망가뜨리라고 준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시스템을 흉내 내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령님과 바른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나아간 것처럼 그런 모습을 갖추자는 뜻일 것이다. 사도행전 1:8을 다시 한 번 깊게 읽어야 할 시점이다. 


주(註)

*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 최원준 씀 / 그말씀 2010년 4월호 / 두란노 / 44쪽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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