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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07. 2016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종교개혁 500주념 기념 시리즈 1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의견서를 내걸면서 종교개혁은 시작하였다. 당시 비텐베르크는 인구 3천 명의 작은 도시였다. 이 작은 마을 교회 문에 붙여 놓은 종이 하나가 전 유럽을 뒤흔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비텐베르크

1. 권력자에게 무조건 순종해라!


당시 중세 가톨릭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왕을 임명하기도 하고 폐위하기도 하였다. 교황이 임명한 왕은 곧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므로 모든 백성은 그 앞에 무릎 꿇고 복종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에게 반항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자였다. 아무리 나쁜 왕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나쁜 법이라도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 했다. 반항은 용납하지 않았다. 만일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왕이나 교황에게 적대적인 발언이나 글을 쓰면, 곧 화형당해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교황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가톨릭은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여 평민들이 성경을 읽지 못 하게 하였다. 더욱이 성경을 지금 시세로 5억 원 정도로 팔았으니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성경을 구한다 해도 모두 라틴어로 써 있어서 배우지 않은 사람은 읽을 수 없었다. 라틴어는 서양 언어 중 가장 어려운 언어로서 500년 전 중세 유럽 사회에 라틴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심지어 미사를 집례하는 사제들조차 라틴어를 알지 못하였다. 


기록된 성경을 읽지 못하니 대신 성상이나 성화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사제도 교인들도 성경을 모르니 성화나 성상을 보고 마음대로 상상하여 가르치고 기도하였다.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 상상력에 의존한 신앙은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은 그저 가르쳐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알지 못하였다. 백성의 눈과 귀를 막는 우민화 정책은 독재자들이 즐겨 행하는 수법이다. 


중세 가톨릭이 저지른 또 하나의 잘못은 공로 사상이다.  바울과 충돌한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 안 되고 할례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톨릭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 안 되고 공로(선행)를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공로를 쌓아야 하는데 그 길은 착한 일을 하거나, 봉사활동, 구제활동, 헌금,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 등이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8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 참여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공로를 쌓는 것이라 가르쳐 어리석은 백성을 미혹하였다. 


공로 사상은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잉여 공로 사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천국에는 사람마다 공로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에 공로가 쌓여 넘쳐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다는 사상이 잉여 공로 사상이다. 그러니까 자기만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자녀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공로를 넘치게 쌓으라고 가르쳤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하여 독일의 대부호 푸거에게 엄청난 돈을 빌렸다. 그 돈을 갚기 위하여 유럽 전역에 면죄부(indulgence)를 판매하였다. 도미니크 수도사인 테첼(Johann Tetzel)은 “돈이 헌금함에 짤랑하고 들어가는 순간, 영혼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게 됩니다”라고 설교했다. 심지어 “면죄부를 사면 성모 마리아를 범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2.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요인 1 - 인쇄술


비텐베르크의 어리석은 백성은 면죄부를 사기 위하여 엘베 강을 건너다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에 루터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 의견서를 붙여 놓고 토론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름도 없는 시골 마을 작은 교회당에 붙여 놓은 종이쪽지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루터는 95개 조항을 라틴어로 써 놓았다. 아무도 읽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터는 독일어로 다시 써 붙여 놓았다. 독일어로 된 95개 조항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

마침 1445년 스트라스부르흐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루터의 95개 조항을 누군가 프린트하여 퍼트리기 시작했는데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사실 루터 이전에도 로마 가톨릭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혁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죄로 화형당하였다.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와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의 권위만 인정하였다는 죄로 화형당하여 죽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과 달리 루터는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독일 전역으로 개혁 사상을 퍼뜨릴 수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3년 후인 1522년 9월 루터를 재판하기 위하여 보름스에서 회의가 열렸다. 친구들은 루터를 말렸다. “앞선 개혁자들이 다 화형당하여 죽었으니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가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 종교재판은 일방적으로 루터를 공격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그의 종교개혁 사상을 철회하도록 하였다. 루터는 최후 변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루터는 마침내 파문당하였다. 루터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 빠졌다. 파문은 모든 사람에게 루터를 죽이라는 명령과 같았다.  

보름스 종교회의에 선 루터

3.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요인 2 -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은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루터를 보호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보름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루터를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루터는 발트부르크에 1년 동안 머물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522년 9월 3천 부를 찍어낸 독일어 성경은 한 달 만에 다 팔려 나갔다. 그 후 11년 동안 85판 인쇄가 되었는데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거기엔 까닭이 있다. 5억 원 짜리 성경을 단돈 150만 원에 팔았다. 엄청난 가격 파괴였다. 독일어 성경의 보급은 지금까지 우매했던 사람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었다. 교황과 황제의 폭정과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을 protestant(저항자, 항의자)라 불렀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권세나 권위에 머리 숙이지 않았다. 루터는 최후 변론에서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와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세속의 권력 앞에 뜻 없이 무릎 꿇지 않겠으며,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생명이라도 내놓을 각오였다. 루터로 말미암아 시작된 개신교(protestant)는 부당한 권력을 거부하고 항의하고 저항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에 한계가 생겼다. 루터는 가톨릭과 대척점에 확실히 서기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강조하여 가르쳤다. 칭의론(믿음으로 구원받음)에 집착하다 보니 개신교인들이 선행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주여! 주여!”하고 기도만 하고 “믿습니다!” 만 하면, 신앙생활을 다 한줄 생각하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기도만 하자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엎드르기만 하였다. 


4. 종교개혁을 완성한 존 칼빈 


루터보다 26년 늦게 태어난 존 칼빈은 종교개혁 2세대였다. 그는 종교개혁 1세대인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을 이어 종교개혁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신앙은 현실에 적용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영역 주권 교리를 가르쳤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의 영역이 있는데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여야 한다. 부조리함과 부패함이 있으면, 과감히 바른 소리를 하고 개혁하고 고치려는 노력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삶의 현장 속에 생활로 옮겨지도록 강조하였다. 칼빈은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도 가르쳤다. 칼빈은 그렇게 칭의론 위에 성화론을 가르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칼빈은 가르쳤다. 칼빈의 제자인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장로교를 창시하였는데 그의 주된 사상 중 하나는 영국 여왕에게 저항하여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이루자고 가르쳤다. 왕이 잘못했을 때는 능동적으로 강력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존 칼빈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나타난다. 왕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잘못을 범할 때 거짓 선지자는 왕에게 아첨하였다. “왕이여 만세 무강하소서. 우리가 왕을 지켜드리겠나이다. 왕은 평안할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왕이 무고한 백성을 억압하고 괴롭혀도 눈을 감고 말하지 않다가 왕이 잘못했을 때는 용서의 교리를 말하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니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왕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 모두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참 선지자인 이사야, 예레미야는 눈물로 왕에게 심판을 선언하였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저주하였으며,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말하였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처럼 부당한 권위에 항의하였으며 하나님의 권위에만 오직 복종하였다. 지금 개신교는 참된 선지자의 길을 가느냐 거짓 선지자의 길을 가느냐 갈림길에 서 있다. 국가만 위기가 아니라 지금 개신교도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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