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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Feb 08. 2017

패전으로부터 구원, 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8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수호하는 스위스 용병 760명 전원은 왕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왕정 수비대는 분노한 군중이 무서워 모두 도망간 후의 일이다. 이미 전세가 완전히 기운 것을 안 루이 16세는 용병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만 철수해도 좋다.”


그러나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루이 16세를 지켰다. 살아남았던 이들은 왕이 의회 광장으로 끌려가는데 호위를 하고 나서 왕과 함께 처형되었다.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신의를 지켰던 스위스 용병을 기리기 위하여 1824년 루카스 아호른은 스위스 루체른에 ‘빈사의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사자는 죽어간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며 심장에 부러진 창이 꽂혀 있고 죽어가면서도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다. 사자상 위에는  "HELVETIORUM FIDEI AC VIRTUTI”(스위스의 충성심과 용감함)이란 뜻의 라틴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빈사의 사자상

스위스는 높은 산맥들과 넓은 호수들이 자연스럽게 경계를 이루는 작은 나라다. 13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스위스의 언어, 문화, 정치, 경제는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마땅한 수입원이 없던 스위스는 중세 용병 시장에 진출하였다. 높은 산악지대에서 다져진 체력과 용맹함으로 스위스 용병은 인기를 누렸다. 스위스 용병은 6m 미늘창으로 기사를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유명하다.

 

14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스위스 연방에서 백삼십만에서 백오십만 정도의 남자들이 용병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생존자는 약 30%에 이른다. 용병제가 절정에 이르렀던 1500년 무렵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10~12%가 용병에 참여하였다. 용병이 벌어들인 수입에 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컸다. 전쟁터에서 생명을 내걸고 싸웠지만, 정작 배를 불린 것은 교황청과 제국주의자들이었다. 스위스 가톨릭 교회는 용병장사를 하였고, 교황청이나 프랑스 같은 제국은 용병으로 손쉽게 다른 나라를 점령하였다. 돈 몇 푼에 팔려나간 스위스 젊은이들은 소모품이었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루터가 출생한 후 두 달이 되지 않은 1484년 1월 스위스 산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삼촌에게 처음 글자를 배운 후 바젤과 베른에서 인문주의를 공부하였다. 1506년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글라루스(Glarus)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학자였다. 당시 대부분 사제들은 무식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신약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츠빙글리는 기하, 지리, 철학, 신학, 언어학, 고전 등 각 분야를 골고루 섭렵하였다.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에 능통하였으며, 그의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키케로”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츠빙글리는 1512년과 1515년 두 차례에 걸쳐 자기 지역 출신 용병 사제로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였다. 첫 번째 원정은 승리로 끝났는데 자기 교구 신도들이 피정복자를 무차별로 약탈하는 것을 보았다. 두 번째 원정은 패배로 끝났는데 천여 명의 교구 식구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적들도 같은 스위스 용병이었다. 돈 몇 푼 때문에 같은 동포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츠빙글리는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알프스 가파른 구릉지를 오르내리며 양을 돌볼 때부터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웠던 츠빙글리다. 그의 전기작가들은 한결같이 “츠빙글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위스 사람이었다.”고 한다.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현실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루터는 개인의 신앙 문제로 고민하다 종교개혁의 길에 들어선 반면, 츠빙글리는 사회와 민족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종교개혁의 길에 이르렀다. 16세기 당시 경제적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한 젊은이들이 돈 몇 푼에 용병이 되고, 한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일은 참혹하였다. 이러한 용병제도로 백성이 조금이라도 잘 살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배를 불리는 것은 가톨릭 교회였다. 용병들 역시 전쟁터에서 살육하며 번 돈이므로 의미 있게 사용하지 못하였다. 백성은 점점 타락하였고, 몇 푼 벌어온 돈은 흥청망청 낭비하였다. 사회가 병들어 가는 모습을 본 츠빙글리는 용병제도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글라루스 시민은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츠빙글리를 싫어하였다. 그나마 용병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츠빙글리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츠빙글리는 1516년 글라루스를 떠나 아인지델른(Einsiedeln)으로 그리고 1518년 취리히로 자리를 옮겼다. 


16세기 취리히 인구는 약 5,000명이었다. 오래전부터 취리히는 스위스 내륙 지역과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지의 여러 나라와 국제무역을 하였다. 취리히는 비단을 짜는 수공업이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수공업자들은 귀족들과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에 올라섰고, 정치와 행정이 수공업자 조합(Zunft)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그들은 용병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츠빙글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가 전쟁의 폭력을 정의롭게 사용하거나 법질서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외국 군주의 종이 되고 죄 없는 나라를 약탈하고 점령하고 황폐화한다면, 어찌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은 돈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지도자들, 곧 교황과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가축을 잡아먹는 늑대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늑대를 잡으러 몰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타락시키는 늑대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 늑대들은 빨간 모자와 외투를 걸친 교황과 주교들입니다. 이들을 잡아 흔들면 금화와 은화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이들을 비틀어 짜면 당신의 아들과 형제 그리고 아버지와 좋은 친구들의 피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츠빙글리는 땀 흘리는 건전한 육체노동이 아니라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노동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일깨웠다. 


“현재는 아무도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밭에 풀만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 잘 경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츠빙글리의 영향으로 취리히는 용병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취리히 시의회에 용병을 보내도록 강요하며 교회에 복종하라고 하였다. 한 개 도시로서는 교황청을 대적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츠빙글리는 개혁 정신에 동조하는 다른 도시들과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1524년 “스위스 연방에 대한 간곡한 경고”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취리히 시의회는 12개 스위스 연방에 편지를 발송하고 종교개혁의 입장과 상황을 설명하고 자주적인 길을 걷자고 호소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교만하고 부도덕한 귀족들을 몰아내었고,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았고, 용감하게 싸워서 외국의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그들로부터 자유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방탕하여서 새로운 귀족계급을 만들어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돈을 추구하느라 용병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외세의 종이 되었습니다.” 


1528년 2월 베른이 공식적으로 개신교를 선택하자 취리히, 콘스탄스, 베른 등 개혁파 도시들은 그해 6월 “기독교 시민 동맹”을 출범시켰다. 1528년 생 갈렌, 1529년 비엘, 뮐하우젠, 바젤과 샤프하우젠이 가담하였다. 1530년 스트라스부르허가 가입했으나 츠빙글리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스위스는 종교개혁파와 가톨릭 파로 나뉘었다. 1529년 6월 25일 카펠에서 개혁파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약이 맺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며 전력을 보강한 가톨릭 측은 1531년 10월 11일 8,000명의 군대로 취리히를 공격하였다. 취리히는 적의 깃발이 보일 때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황급히 소집합 취리히 군대는 이외르크 괴들리의 지휘 아래 전투에 임했으나 대패했다. 츠빙글리도 중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그는 가톨릭 고해신부의 도움을 거절한 채 죽었는데, 그의 육체는 갈기갈기 찢겨져 돼지고기와 함께 불태워진 후 똥과 함께 섞였다.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불과 9년 만의 일이다. 1531년 10월 11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카펠에는 그가 죽을 때 남겼다는 말을 새겨놓은 기념비가 있다. 


“너희가 나의 몸을 죽일 수는 있으나 나의 영혼은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 용병제도의 문제성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츠빙글리는 의식 있는 개혁자였다. 말만 번지르르한 개혁자가 아니었으며, 이론만 내세우는 개혁자가 아니었다. 그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착취 구조를 내몰기 위해 생명을 바쳤다. 경제적 부조리함과 구조 악에 저항하면서 민주주의 기틀을 다졌다.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온몸을 바친 츠빙글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스위스는 다른 나라 전투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의했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영구중립국이 되었다.

 

패전으로부터의 구원(Ex Clade Salus)

1965년 스위스 신학자 페터 보겔장어(Peter Vogelsanger, 1912~1995)는 “패전으로부터 구원(Ex Clade Salus)”라는 글과 함께 기념비를 세웠다.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불링거, 칼빈에 의해 개혁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고통을 당하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옳은 편에 서 있다.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라. 그분께서 우리뿐 아니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돌보실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질지어다.” - 츠빙글리


참고도서

1. 유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서영일 옮김, (서울 : 은성, 1989)

2. 루이스 W. 스피츠, 종교개혁사, 서영일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3. 스티브 오즈만, 개혁의 시대, 손두환, 강정진 옮김, (서울 : 도서출판 칼빈서적, 1998)

4. 카터 린드버그,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조영천 옮김, (서울 : CLC, 2012)

5. 스티븐 니콜스, 세상을 바꾼 종교개혁 이야기, 이용중 옮김, (서울 : 부흥과 개혁사, 2009)

6. 정미현, "용병제도를 통해 본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사회 경제적 배경"  ⌜유럽사회문화⌟ 제15호 (2015)

7.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 츠빙글리 윤리의 현대적 적용"  ⌜기독교사회윤리⌟ 제31집 (2015)

8. 박경수, "스위스 개혁교회의 아버지 츠빙글리의 흔적을 따라가다."  ⌜목회와 신학⌟ 1월호 (2015)

9.김해연, "즈빙글리 신학의 상황"  ⌜기독교신학저널⌟ 제1집 (1998)

10. 임희국, "16세기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사회윤리에 조명해 본 오늘의 시장경제"  ⌜장신논단⌟ 제18집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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