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9
츠빙글리 시대 스위스는 다른 나라와 달리 독특한 연합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1291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대항하여 산악 지방 3개 주(cantons)가 공동 방위조약을 맺음으로 연합체제가 시작되었다. 작은 연방체였지만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합스부르크 세력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었다. 그들은 모르가르텐(Morgarten, 1315), 젬파흐(Sempach, 1386), 네펠(Näfels, 1388) 전투에 연이어 승리함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자긍심과 민족의식을 가졌다. 1513년 13개 주가 연방에 가입하며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것은 일반 평민들이 이루어낸 아주 특별한 업적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배경 아래, 1484년 1월 1일 알프스 산맥 고지대에 위치한 빌트하우스(Wildhaus)라는 작은 마을에서 츠빙글리는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농부로서 마을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츠빙글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교육하여 스위스 민족을 위해 크게 쓰임 받기를 소망하였다.
그는 8살 때 삼촌이 교장으로 있던 베젠(Wesen)학교에 입학했다. 10살 때 바젤(Basel)의 성 테오도르(St. Theodore)학교로 전학하여 3년 동안 라틴어, 변증법, 음악을 공부하였다. 13살 때 베른(Bern)으로 옮겨서 2년간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서 하인리히 뵐프린(Heinrich Wölfling)의 영향을 받았다. 뵐프린은 인문주의를 추종하던 사람으로서 츠빙글리에게 고전에 대한 사랑과 음악의 즐거움을 가르쳤다. 츠빙글리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 류트, 하프, 바이올린, 리드 파이프 등을 다룰 수 있었다. 그 후 잠시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가 16살 때 빈 대학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당시 이 대학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선생은 콘라드 켈티스(Conrad Celtis)였는데, 독일의 인문주의자로서 고전문학 선생이었다. 18살 때 바젤로 와서 2년간 공부하고 1504년 B.A를 1506년에 M.A. 학위를 마쳤다. 바젤에 있는 동안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ittenbach)에게 에라스무스적 개혁신앙을 배웠다. 그는 에라스무스를 흠모하여 편지로 왕래하며 지도를 받았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를 “학자 중에 가장 박식한 학자”로 불렀다.
1514년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신약성경 사본을 모으려고 바젤에 들렀다. 츠빙글리는 한걸음에 바젤 대학으로 달려가 에라스무스를 만났다. 꿈에라도 보고 싶었던 대학자였기에 400리 길(158km)이 멀다고 느끼지 않았다.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간할 때까지 에라스무스와 츠빙글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츠빙글리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그는 그것을 보물처럼 여겼다. 그는 자기 집 2층 서재에서 날마다 헬라어 성경을 탐독하였다. 바울 서신을 전부 필사하였고, 여백에는 본문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으로 가득 채웠다. 1516년부터 1518년까지 2년 동안 그는 헬라어 성경에 파묻혀 살았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그렇게 준비되었다.
1518년 10월 말 취리히 사제가 되어 강단을 맡았을 때, 그는 충격적 선언을 하였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사제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예전 중심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성경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교회력에 따라 미리 주어진 본문을 선택적으로 설교(lectio selecta)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성경을 마태복음부터 차례로 강해 하겠다고 공포하였다. 그는 강단에 헬라어 성경을 놓고서, 본문을 직접 해설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의 설교는 충격이었다. 당시 회중 가운데 젊은 인문주의자 토마스 플랫터(Thomas Platter)는 원문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듣는 순간, 마치 누군가 위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츠빙글리는 성경을 풀어 가르치므로 그릇된 사상과 관습에 매여 있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츠빙글리는 6년에 걸쳐서 신약전서 전부를 강해 하였다. 모든 말씀을 빠짐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 하는 것은 이후 개혁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성경은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심장이었다. 그는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츠빙글리에게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이었고, 해방의 말씀이었다. 1522년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에 관하여’라는 소책자를 펴냈는데, 거기서 츠빙글리는 “우리 종교의 기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다.”라고 천명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525년 6월부터는 ‘예언(prophezei)’ 이라 불리는 성경 연구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는 헬라어 성경을 읽고, 교부들의 글을 이용하여 본문을 강론하였다. 헬라어 강독을 하지 않을 때는 라틴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가르쳤다. 츠빙글리는 전통에 호소하는 로마 가톨릭의 오류와, 성경 본문보다는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추구하는 급진주의자들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철저한 성경 연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은 후에 칼빈과 청교도에게 그대로 이어져 개혁 교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하였다. 궁극적으로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민 전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기를 소망하였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모두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둘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성경에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개혁비전은 서로 달랐다. 루터는 성경이 무엇보다 구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으로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반면 츠빙글리는 성경이 무엇보다도 윤리적 삶을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시민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쳤고, 그들이 말씀에 의지하여 판단하고, 따르기를 원하였다.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는 모든 시민 앞에서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면, 시민들이 바르게 결정하고 바르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신앙공동체에 종교적 판단과 결정권을 주었다. 이는 ‘신앙의 민주화’로서 후일 스위스 전 지역이 츠빙글리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교황에게 권위를 부여했던 가톨릭이나, 군주나 개혁자 자신이 강론하는 것에 권위를 두었던 루터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취리히에서 여러 차례 시민과 토론하고 논쟁하였다. 1523년 1월 29일 성인 숭배, 금식 관습, 마리아 예배 문제를 가지고 첫 번째 토론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 전역의 사람을 초청하였다.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 600명이 시민회관에 모였다. 취리히 주교인 콘스탄스를 초청했으나 그는 종교법 고문과 감독대리를 겸임하는 존 파버(Johann Faber)를 보냈다. 토론은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진행하였다. 판결의 기초는 성경이었다. 츠빙글리는 말하였다.
“오늘은 취리히의 양복 집이나 구둣방 주인도 성경 문제에 관한 한 대학교수와 동등하게 발언해도 좋고, 또 발언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느 누구건 우리의 규칙을 무시하고 성경을 인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에 따라 그를 반대할 것이며 기꺼이 (가톨릭의 전통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교회의 동의가 없으면 복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토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를 취리히 방언으로 능숙하게 번역할 수 있었던 츠빙글리를 상대할 자는 없었다. 존 파버는 기가 죽어 '자신은 불일치의 원인을 듣기 위해 온 것이지 논쟁에 참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시의회와 시민은 츠빙글리가 제시한 개혁 프로그램을 취리히 시의 공식 정책으로 삼기로 하였다.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을 작성하였는데, 이 문서는 취리히 종교개혁을 선언하는 헌장이 되었다. 이 조항에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주장했고,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강조했으며, 교황, 미사, 행위를 통한 구원, 성인들의 중보, 수도원, 성직자의 독신, 고해성사, 연옥 등을 반대하였다.
1523년 10월 2차 토론회가 더 큰 규모로 열렸다. 800명이 모였다. 가톨릭에서 단단히 준비했지만 츠빙글리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524년 6월 취리히 시는 질서정연한 가운데 교회 안의 성상을 제거하였다. 그해 12월 수도원은 폐지되고 그 재산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지 사업으로 바꾸었다. 1525년 4월 15일 미사도 폐지하였다.
츠빙글리는 말씀의 개혁자였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였고, 성경을 가르쳤다. 성경을 듣고 배운 청중은 말씀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의 기대대로 취리히 시민은 개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는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로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다.
종교가 부패할 때는 언제나 말씀에 무식한 성직자들이 득세한다.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세상적 사고방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리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쳐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결국, 멸망으로 끝을 맺는다. 목이 곧고 귀가 어두워 말씀을 외면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에게 확실한 교훈이 된다. 지금 이 시기는 진정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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