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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6. 2017

종교개혁의 길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27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함으로 기독교는 박해받던 종교에서 하루아침에 지배하는 종교로 바뀌었다. 상황이 역전되고 위치가 바뀌면서 복음 전파 전략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전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로마의 압제에서 기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외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약한 자였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취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십자가 복음을 믿으며 그 복음대로 살다가 기꺼이 죽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은 “마라나타”를 조용히 읊조리며 엎드려 기도했다. 하루하루 숨죽이며 살면서도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에 목숨을 걸었다. 직업도 잃어버리고, 가족도 잃어버리고, 땅굴 속 수십 미터 아래 내려가 살면서도 이 복음이 생명인 줄 알고 주의 복음만 부여잡고 살았다. 세상 사람이 조롱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물의 찌꺼기만도 못하고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밟으면 밟혀야 하고, 죽이면 죽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세상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여 감옥에 가두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핍박하였다. 세상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듯 보이는 기독교 복음이 세상을 뒤엎을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의 실체를 알았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세상이 미련한 것 같고,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지만 놀랍게도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금방 알아차린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된 후 더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이유가 없어졌다. 이제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사람 보기에 미련하고 둔한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능력과 달리 세상의 능력은 막강하였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교회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다. 왕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독교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질까 봐 벌벌 떨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점점 잃어버리고 오직 세상 권력에 집중하였다. 세상 권력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어느 집안에서 누가 교황이 되느냐로 그 집안의 흥망성쇠가 가름되었다. 중세 교회 권력이 타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6세기 유럽은 최악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숨이 막혔다. 그때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의 말씀을 높이 든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이었다. 그들은 과감히 세속의 모든 권력에 당당히 맞서 싸웠다. 그들은 생명을 내걸었다.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오직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직업을 잃고, 파문당하고,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죽임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마틴 루터 34살

츠빙글리 33살

필립 멜랑히톤 21살

마틴 부처 27살

하인리히 불링거 24살

존 칼빈 24살

존 칼빈은  1509년 프랑스 파리 근처 누아용(Noyo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에서 출발하여 주교의 법률 고문과 비서를 거쳐 결국 교황청의 고증인과 대성당 참사회의 후원자가 되었다. 당시 누아용의 주교인 샤를 드앙제(Charles de Hangest)를 보필하면서 그의 집안과 가깝게 지내었다. 칼빈은 주교의 도움으로 교회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다. 칼빈은 14살 때 드앙제 집안의 아이들과 함께 파리로 나가 마르슈 대학(Collège de La Marche)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코르디에(Marthurin Cordier)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코르디에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칼빈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칼빈이 세운 제네바 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다. 칼빈은 데살로니가 주석을 스승인 코르디에에게 헌정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라틴어 공부를 이제 막 마친 어린 나를 파리로 보냈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섭리로 잠시 동안 나의 스승이 되어서 나에게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로 인하여 나는 이전보다 나은 학생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 당신의 수업은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으며, 후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신의 수고 덕분입니다.”


1년 후 그는 몽테귀 대학(Collège Montaigu)으로 옮겼다. 몽테귀 대학은 반종교개혁 사상의 중심으로서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다. 에라스무스와 라블레도 이 학교에 다녔는데 몽테귀 대학의 교육 방법과 교육 내용을 심하게 비판하였다. 예수회 창시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도 칼빈 보다 4년 늦게 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칼빈은 몽테귀 대학에서 4년 동안 철학과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였다.


19살이 되던 해 칼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관이 되기 위하여 오를레앙(Orleans) 대학 법학부로 옮겼다.  당시 아버지는 대성당 참사회와 문제가 생겨서 출교를 당하였다. 더 이상 교회 장학금을 받을 수도 없고, 신학자나 사제로서 성공할 길도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칼빈은 고전이나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과 부르주 대학, 파리 대학을 오가며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때로 교수를 대신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531년 2월 14일 그는 오를레앙 대학 교수회의 만장일치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1531년 5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칼빈은 자신이 정말 공부하고 싶은 고전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532년 그는 세네카(Seneca)의 관용론 주석을 썼다. 그는 관용론 주석을 지금까지 공부하도록 후원해 준, 그러나 지금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된 드앙제 가문의 클로드 드앙제에게 헌정하였다.

“나의 모든 것 - 나의 모습과 나의 소유 - 이 당신의 은혜로 되었기에, 그뿐만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당신의 집에서 교육을 받고, 당신과 함께 공부하러 다니게 되었기에, 품위 있는 당신의 가문으로부터 받은 지식과 삶의 양식에 관한 첫 번째 가르침을 돌려드립니다.”


24살 되던 1533년 그는 Francis Daniel에게 보낸 편지에 비로소 “종교개혁”이란 말을 언급하였다. 그가 정확히 언제 회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편지를 근거로 그때쯤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1533년 11월 1일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 콥(Nicolas Cop, 1501~1540)이 파리 대학 학장으로 취임할 때 연설문을 칼빈이 써주었다. 연설문은 인문주의적이었고 개혁주의적이었다.


소르본 당국과 의회는 콥의 연설이 구교에 대한 신교의 선전포고라 생각하여 가혹한 압박을 가하였다. 칼빈과 콥의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파리를 탈출하여 콥은 바젤로 가고 칼빈은 앙굴렘(Angoulême)에 사는 친구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et)의 집에 숨었다. 그때 칼빈은 24살 콥은 32살이었다. 칼빈은 그 후 3년 동안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 와중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써서 1536년 3월에 출간하였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종교개혁은 말씀의 능력을 믿고 진리 하나만을 굳게 부여잡고 나아갔던 발걸음이다. 고향에서 쫓겨나고 수배자가 되고 혹자는 붙잡혀 죽임당하였다. 그들은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하였고, 가난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그들은 세상의 권세나 물질의 풍요로움에 조금도 현혹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말씀을 깨우치고, 성경 지식을 알아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물 어린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국 교회에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말로만 이론으로만 개혁하자고 외친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정권의 실세에 기대어 볼까 꿈꾸고, 어떻게 하면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 안주할까를 생각하면서 입만 요란하다. 사람들은 출석 교인 수, 교회 건물, 재정 현황으로 교회를 평가한다. 하나님, 말씀, 복음은 교회 성장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하였다. 진정한 종교개혁이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다시금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모두 내려놓아야 하지만, 욕심 많은 우리는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한국 교회를 낮추시고 깨뜨리시고 부서뜨리시나 보다. 잃을 것도 없고, 내려놓을 것도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 비로소 하나님을 부여잡을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하시나 보다.

더 깨어지고 더 부서지기를…그제서야 진정한 종교개혁이 시작될터이다.


참고도서

1. 크리스토프 슈트룸, 개혁자 칼뱅, 문명선, 이용주 옮김, (서울 : 넥서스 CROSS, 2009)

2. 헤르만 셀더르하위스, 칼빈, 조숭희 옮김, (서울 : 대성 Korea.com, 2011)

3. 불페르트 더 흐레이프, 칼뱅의 생애와 작품 세계, 박경수 옮김,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6)

4. 존 위티 주니어, 권리와 자유의 역사, 정두메 옮김, (서울 : IVP, 2015)

5. 카터 린드버그,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조영천 옮김, (서울 : CLC,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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