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Dec 27. 2016

참 선지자는 누구인가?

예레미야와 하나냐

세상이 어지럽다. 참과 거짓이 섞여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다."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 데 도무지 사실처럼 들려지지 않는다. 정말일까? 거짓일까?


이건 청문회장이나 세상 법정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 한때 이장림 일파가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예수님께서 1992년 재림한다고 설교하였다.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재산을 정리하여 헌금하고, 가정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얼마 전 SNS에 스스로 선지자라고 떠벌리며 2014년 12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여자가 있었다. 예비역 공군 소장 출신 장로는 남한에 이미 80개의 땅굴이 있어서 전쟁이 나면 남한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다. 종북 세력을 몰아내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징계하실 것이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몇 사람은 이장림 때처럼 재산을 처분하여 외국으로 피신 가기도 하였다. 너무나 확신에 차서 하는 말에 무지한 사람들은 그들을 믿고 따랐다.


사도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권하였다. (요일4:1) 신명기에도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면서 분별하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신명기는 참과 거짓을 시간이 판가름해줄 것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시한을 정해 놓고 부활이나, 재림이나, 전쟁을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증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거짓 예언을 듣는 순간에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기라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엘리야 시대는 바알 선지자와 여호와의 선지자를 구별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기적을 보여줌으로 누가 참 선지자인지 확증하였다. 그러나 문서 선지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선지서를 쓴 선지자들)은 엘리야와 같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에게 말씀을 받아 예언하였다. 안타까운 일은 거짓 선지자도 같은 방식으로 예언하였다. 듣는 청중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 28장은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때는 시드기야가 유다를 다스린 지 4년 되는 해였다. 시드기야는 조카이자 선왕인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느부갓네살에 의해 21살 나이로 유다 왕이 되었다. 본래 이름은 맛다니야인데 바빌론식으로 개명하여 시드기야라 불렀다. 바빌론의 공격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웠지만, 시드기야가 국정을 잘 이끌어 제법 안정을 찾았다. 그는 인근 나라들의 힘을 모아 바빌론에 대항하는 동맹을 만들었다. 바빌론의 두 차례 공격으로 나라가 황폐해졌고, 백성은 바빌론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하였다. 시드기야가 반 바빌론 정책을 사용한 것은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 정서와도 맞아떨어졌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나라가 바빌론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며 바빌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하였다. 친 바빌론적 설교를 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환영받지 못하였다. 예레미야 자신도 자신의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를 네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의 메시지에 스스로 눈물을 흘렸다.(렘 1:6, 4:10, 14:13, 32:17) 어떻게 해서든 선지자의 사명을 피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7)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는 참으로 비극적인 선지자였다. 기적을 보이는 능력도 없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그는 눈물의 선지자였다. 그는 어깨에 멍에를 메고 다니며 멸망을 예언하였다. 그가 21년 동안 하나님 말씀을 전하였지만, 그의 메시지에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당시 백성의 생각과는 반대로 바빌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시드기야의 정책과 이스라엘 민족정신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제사장 성읍으로 널리 알려진 기브온 출신으로 앗술의 아들 하나냐 선지자였다. 기브온은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 전 여호와의 성막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대상16:39) 그는 예레미야처럼 제사장 집안의 선지자였다. 그의 출신, 부모, 직함을 소개하는 것을 보아 하나냐는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 있는 선지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 앞 모든 백성이 보는 가운데 담대히 선포하였다. (렘28: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렘28:2)

그는 선지자가 신탁을 받을 때 쓰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반 바빌론 정책을 사용하는 시드기야를 확실하게 지지하는 예언이었다. 그는 어깨에 멍에를 메고 다니는 예레미야를 염두에 두고 메시지를 증거하였다. 예레미야와 반대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평화, 바빌론의 패망을 예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냐의 예언에 환호성을 터트렸음은 확실하다. 희망과 승리, 평화와 회복을 전하는 데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나냐가 전혀 근거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하였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사10:2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하나냐는 아주 구체적으로 날짜까지 명시함으로 설득력을 더욱 높였다.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려 오리라.”(렘28:3)


확신에 찬 하나냐의 말에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그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원하는 바이며 동시에 예레미야 자신도 원하는 바다. 브레바드 차일즈(Breverd Childs)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실 자유를 부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냐에게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멸망을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이 너를 통하여 그와 다른 것을 말씀하실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다른 목적을 갖고 계실 가능성을 받아들인다.”1)


마틴 부버(Martin Buber) 역시 비슷한 해석을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다 아는’듯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예레미야 자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사실 하나님은 불과 한 시간 전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지금은 또 다른 시간이다. 역사는 역동적 과정이다. 역사는 지금이 지나간 시간과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태엽을 감아놓으면 그것이 다 풀릴 때까지 내쳐 달리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간에 하신 말씀이라도, 누군가가 자기 목에 멍에를 멤으로써 순종한 말씀이라도, 이 말씀을 플래카드처럼 내걸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를 가지고 계시지, 시스템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2)


예레미야는 일단 하나님이 하나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자기 생각을 말한다. 그는 하나냐와 달리 ‘내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이것은 순전히 자기 생각임을 밝힌다.

“그러나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렘28:7)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았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는 말은 자신이 앞서간 예언자들의 말을 종합하여 해석한 결과임을 말한다.

“나와 너 이전의 선지자들이 예로부터 많은 땅과 큰 나라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렘28:8)

예레미야는 앞선 선지자들의 말과 신명기를 근거로 자신의 신학을 말하였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세를 통하여 받은 여호와의 율법을 되새기며 그 율법대로 나라가 운영되기를 소망하였다. 구약의 역사서, 선지서, 지혜서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며 주신 율법 정신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고민하고 그 말씀의 뜻을 탐구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였다. 신구약 성경은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나라, 정의와 공의가 바르게 집행되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였다. 예레미야는 앞선 선지자들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실패했음을 언급하며 심판을 선언하였다.


비록 하나냐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려도, 예레미야는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성경 전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일치하느냐?”를 따졌다. 누가 하늘 회의에 참석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해도 예레미야는 흔들리지 않았다.(렘23:18,21) 거짓 선지자일수록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른다. 하나냐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즉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모든 백성 앞에서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건 명백히 거짓이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줄 모르고 뻔뻔스럽게 거짓을 설교하였다.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냐가 이사야의 말씀을 읽는 중에 감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했을지 모른다. 그가 무슨 악의나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그는 역사적 상황을 잘못 읽었다. 이사야가 멍에를 꺾어버리겠다는 말씀을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였다. 성경 말씀을 설교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설교하면 거짓 선지자로 판결날 수도 있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에 신문을, 한 손에 성경을(Man solle in der einen Hand die Bibel, in der anderen die Zeitung halten.)”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난 말씀을 증거하는 자라면 마땅히 자신이 사는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바로 읽을 줄 알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중심 메시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약3:1) 언제라도 하나냐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오늘도 나는 성경을 보고, 신문을 본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18:20)


주(註)

1. 구약신학 / 브레바드 S. 차일즈 지음 / 박문재 옮김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 1994년 / 159쪽

2. 예언과 분별 / 월터 모벌리 지음 /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 194쪽

3. 특강 예레미야 / 김근주 지음 / IVP / 2014년

4.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예레미야 제21-29장 / 제자원 / 2012년

5. 구약성서주석 예레미야 3 / 존 칼빈 지음 / 성서교재간행사 / 1981년


매거진의 이전글 베들레헴의 성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