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성탄의 계절 온 국민은 가슴이 답답하다. 탄핵 정국으로 마음은 뒤숭숭하고, 불우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 나눔은 예년보다 식은 것 같다. 2016년은 차가운 성탄을 보낼 듯싶다. 그런데 사실 언제 한번 기쁘고 즐거운 성탄을 보낸 적이 있었나 돌이켜 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처음 성탄을 예언했던 미가 선지자 시대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미1:1) 그때 이스라엘은 북쪽의 아시리아가 공격하여 큰 위기를 경험하였다. 아시리아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를 하나둘 점령하였다. 아시리아 대군은 먼저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BC734년 티그랏 필레셑 3세는 이스라엘의 해안 평야를 침공하였다. 미가 선지자의 고향인 모레셋 근처를 지나 시내 광야까지 진출하였다. 다메섹을 황폐하게 하고 갈릴리와 요단 동편 지역을 점령하였다. 전쟁의 광풍이 온 이스라엘을 휩쓸고 지나갔다. 한 번이면 그래도 숨돌릴 만 하다.
10년 뒤 살만에셀 5세가 사마리아를 3년 동안 포위 공격하였다. 그때 이스라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 마침내 BC 721년 사르곤 2세에 의하여 북이스라엘은 멸망하였다. 백성은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다. 남유다인들 무사할 리 없었다. 그들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건 역사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록이고 그때 당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어떠했을까? 예루살렘 서남쪽 40km 떨어진 모레셋이란 시골 마을에 살던 미가는 당시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모레셋은 미가를 소개할 때 등장하고 다른 곳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시골 마을이다. 그는 시골 마을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목격하고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먹는구나.”(미2:1-2)
나라가 어지럽고 힘들수록 더욱 정신 차리고 백성을 바르게 이끌어야 하는데, 권세자들은 오히려 거꾸로 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농민의 집과 밭을 마구 강탈하고 종으로 삼았다. 나라가 언제 망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권세자들은 이런 짓을 저질렀다.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3:1-3)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지만, 미가 시대 권력자들은 해도 너무 했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먹는 흡혈귀 같았다.
미가 선지자는 마침내 심판을 선언한다.
나 여호와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거기에서 빠져나갈 생각은 마라!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리라!
재앙이 내릴 때가 가까이 왔다.(미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실 때는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고아와 과부 심지어 나그네까지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을 완전히 저버렸다. 미가 시대 평범한 사람에게 소망은 단 한 톨도 없었다. 앞이 깜깜하고 답답하여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암흑의 시기에 미가는 놀랍게도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바로 성탄의 메시지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미가는 베들레헴을 다윗의 고향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다윗의 집안을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망가졌다. 비록 메시아인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미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베들레헴이다.
미가 당시 베들레헴은 인구 1,000명을 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8km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본거지를 옮긴 후 점점 잊혀져 가는 마을이었다. 해발 800~900m 산꼭대기에 세워진 베들레헴은 돌과 바위로 가득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작은 마을에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선지자는 예언하였다. 다윗 집안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다. 억눌린 자 하나도 없고, 가난한 자가 부요하게 되고, 병든 자가 회복되는 참 하나님의 나라,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분 메시아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영원에서 오시는 분이다. 인간이 맡아서 다스리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이끄시고 역사하실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미가의 비전이고 소망이고 환상이다.
700년이 지나 미가가 꿈꾸고 소망했던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베들레헴은 700년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에 돌아가 호적을 신고해야 했다. 마리아와 요셉도 고향 땅 베들레헴에 갔는데 방이 없었다. 출산일이 다가온 마리아는 난감하였다. 결국, 그들은 구유에 아기를 낳았다. 이 구유는 말 구유가 아니다. 말은 전쟁에 사용하는 동물이기에 평범한 농민은 키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산악지대여서 말은 쓸모가 없었다. 반면에 나귀는 이스라엘 농민이 흔히 키우는 동물이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악을 오르내리는 데 유용하였다. 그러므로 말은 전쟁의 상징이고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다. 말이 제국의 왕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농민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도 나귀가 가지는 평화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전쟁을 상징하는 말 구유가 아닌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 구유에 태어나셨을 것은 분명하다. 1)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세자나 약한 사람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의 왕이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이스라엘의 정세는 미가 선지자 시대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헤롯 대왕은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인근 지역 2살 이하 어린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하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독재 군주의 모습 그대로다. 로마는 정복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엄청난 세금을 징수할 뿐만 아니라 길을 가는 사람을 강제 징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제사장들은 그 와중에 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바리새인은 자신도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백성에게 강요하여 무거운 멍에가 되게 하였다. 그 답답한 시절, 아무런 소망이 없던 시절 예수님은 어둠을 깨치고 빛으로 베들레헴에 오셨다. 억울하게 우는 이 하나 없고, 서러움에 통곡하는 이 없는 평화의 나라를 세우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올봄 나는 베들레헴을 방문하였다. 베들레헴은 여전히 가난하고 못사는 동네다. 팔레스타인 폭동으로 2005년 이스라엘은 8m짜리 장벽을 세워 베들레헴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그곳에 가두고 허락 없이는 단 한 명도 나올 수 없게 하였다. 베들레헴은 육지 속의 섬이 되었다. 그날 이후 베들레헴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실업률은 70%에 육박하였고, 관광객이 베들레헴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을이 되었다.
하버드 대학 중동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라 로이(Sara Roy)교수는 유대인이다. 독일 나치 치하에서 사라 로이 교수 일가친척이 100명 이상 수용소에서 죽었다. 어머니는 폴란드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때 사라 로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간다면, 관용과 공감과 정의는 결코 실천할 수 없다.” 그녀는 이스라엘로 가기보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사라 로이는 중동 전문가로 이스라엘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1985년 여름,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을 목격하였다. 어느 날 팔레스타인 노인과 그의 손자가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젊은 이스라엘 병사들이 길을 막고 노인을 희롱하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당나귀 입을 억지로 벌리고서 말하였다.
“이런, 당나귀 이빨이 누렇군, 제대로 이빨을 닦아주고 있는 거야?”
일부는 낄낄거리고, 일부는 노인에게 화를 내며 고함을 질러댔다. 어린 손자는 옆에서 울기 시작하였다.
“당나귀 엉덩이에 키스해.”
노인은 처음엔 거부했으나 병사가 고함을 지르고 손자가 울어대자 말없이 순종하였다. 병사들은 큰 소리로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라 로이는 가슴이 찢어졌다. 독일 나치 하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억울하게 매를 맞고 죽어갔던 유대인들이다. 누구보다 폭력을 싫어하고, 누구보다 인권의 소중함을 아는 민족이다. 그런 유대인이 자기 땅에서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대하고, 괴롭히고,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죽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점령이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박탈하는 걸 말한다.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그들의 혼을 파괴하는 일이다. 점령이 노리는 핵심은 팔레스타인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한 권리, 자신의 집에서 일상생활을 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들의 인간성마저 부정하는 것이다. 점령이란 치욕이며 절망이다.” 2)
베들레헴에서 홀로코스트는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세계 곳곳에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약한 자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여전히 뻔뻔하게 자신은 죄 없다고 강변한다. 홀로코스트는 베들레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층에게 정의와 공의, 평화와 사랑을 기대하기는 정말 무리다. 이 어둡고 가슴 답답한 겨울,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그분이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평화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동역자로 그리스도인을 부르셨다. 함께 평화의 나라 만들어 보자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이다. 그리스도인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하고, 억눌린 자의 편에 서야 하고, 눈물 흘리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앞장서지 않는다면, 이 땅에 소망은 없다. 정의와 공의가 바로 세워지는 나라, 평화와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워나가야 한다.
2. 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지음 / 한승동 옮김 / 한겨례출판 / 2013년 / 134쪽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