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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11. 2016

정의가 세워지는 나라

다윗의 기도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해라.”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말을 한 시간이 밤 12시라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진다. 온종일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 다녀오고, 집에 와 숙제를 마친 후 밤 12시 불을 끄고 자려는데 “공부해라.” 말한다면, 그 의미는 더욱 달라진다. 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말(text)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상황(context)이 있기 마련이다. 상황을 무시하고 말만 들으면, 그게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알아내기 쉽지 않다.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제 멋대로 해석하게 된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엡스키(Dostoevskii, 1821~1881)는 성경을 가지고 점치는 버릇이 있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성경을 펼쳐서 아무 데나 읽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워서 말년에 각혈하고 몸이 안 좋았다. 어느 날 자신의 상태가 매우 안 좋아짐을 깨닫고 성경을 펼쳐서 점을 쳤다. 그가 읽은 구절은 마태복음 3:15이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 하고 대답하셨다.”(공동번역)

도스토옙스키는 이 말씀을 자기 죽음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자녀를 불러 유언을 남기고 의사의 치료도 거부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마태복음 3:15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권하는 장면에서 하신 말씀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 상황을 무시하고 텍스트만 읽으면, 이처럼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윗은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그때마다 그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시를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다. 그가 쓴 시 중에 시 22편 말씀이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시는 다윗이 장인인 사울 왕의 핍박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칠 때 쓴 시편이다.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블레셋과 전쟁에 몸 바쳐 헌신하였는데, 도리어 역적이 되어 도망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한가? 사람들은 다윗을 비웃고 조롱하며 멸시하였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22:6-8)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나님께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과 눈물을 헤아려달라고 기도한다. 


사람은 언제 통곡하는가? 언제 호소하는가? 억울 한 일을 당했을 때다. 애매히 고통받을 때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호소하는가? 주변에 그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 있고 재판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정치가에게, 관원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공평하고 정의롭게 다스려달라는 것이다. 약하다고, 가난하다고, 못 배웠다고 사람 무시하지 말고 공평하게 대우하며 사람답게 대우해달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의 정치가들이, 대통령이, 재판장이 약한 자들을 무시하면, 힘없는 백성은 기댈 때가 없다. 어린 학생들이 수백 명 죽어가는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텔레비젼 보면서 나 몰라라 밥이나 먹으며 나와 보지도 않고, 머리 손질한다고 시간 다 보내면, 부모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진다. 힘없는 것도 서러운데,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자신을 보호해주리라 믿고 세금 꼬박꼬박 내었는데 보호는커녕 무시와 멸시를 한다면, 힘없는 백성은 기댈 때가 없어진다. 세상에 그 누구도 편 되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마침내 하나님 앞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한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호소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다윗은 같은 말을 반복하여 자신의 심정이 얼마나 아픈지 강조한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정의가 필요한데 이 세상에 정의란 게 없다. 정의는 권세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약자들에게 필요하다. 정의는 부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필요하다. 문제는 이 세상이 부정하고 부패하여 억울하게 피눈물 흘리는 사람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정의는 없고 불의만 가득하니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에 어찌 정의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습니까?" 

시편의 1/3이 이런 탄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하나님께 호소한다. 

“하나님! 정의를 세워주십시오. 

이 세상의 정치가들, 권세자들에게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재판정을 여시고 우리를 판단하여 주십시오.

더는 역사의 뒤 편에 계시지 마시고 이제 역사의 전면에 나와 주십시오.”


힘없는 성도의 간절한 호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재판정을 여시는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는 묘사한다. 

“야훼께서 재판정에 들어서신다. 당신 백성을 재판하시려고 자리를 잡으신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을 재판하신다. 

"내 포도밭에 불을 지른 것은 너희들이다. 

너희는 가난한 자에게서 빼앗은 것을 너희 집에 두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백성을 짓밟느냐? 

어찌하여 가난한 자의 얼굴을 짓찧느냐?" 

주, 만군의 야훼가 묻는다.”(사3:13-15, 공동번역)

다윗은 하나님이 정의로우신 분이심을 믿었다. 성경은 늘 온 우주 만물을 공의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선지자들은 두로와 시돈, 모압과 암몬, 에돔과 앗수르의 심판을 선언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온 열방과 민족의 하나님이시다. 신실한 신앙인뿐만 아니라 불의한 자들까지도 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이 하나님을 호출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은 정의로운 심판자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삶의 모든 차원 특별히 약한 자, 압제 받는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한 마지막 보호자요 최후의 변론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의 하나님이심을 여러 차례 천명하였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약한 자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다. 비록 지금은 나의 호소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눈물 닦아 주시고, 위로하시는 구원의 주이심을 믿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 고백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란 말 속에 담아내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다윗의 시편은 명백히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말씀이다. 다윗의 상황은 예수님의 상황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도 법과 정의가 완전히 무시당하였다. 로마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제 마음대로 다스렸다. 언제든 무고한 사람의 겉옷을 빼앗고, 강제 부역을 시켰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힘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혔다. 백성은 권세자들에게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였고, 파리 목숨보다 못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다 알고 계셨다. 물론 약자라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허물이 있고 잘못이 있고, 죄가 있다. 그렇지만 자비하신 하나님은 약자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미디안이나 암몬에게 핍박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어 구원하여 주신다. 그들이 신앙생활 잘하고, 도덕을 잘 지키고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저 불쌍해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가슴 아프기에 무한한 은혜를 베푸셨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과 죄악을 다 짊어지셨다. 우리가 훌륭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도덕적이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경건해서도 아니다. 다만 죄악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우리가 불쌍해서고,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에서 억울한 고통을 받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과 눈물과 괴로움과 허물과 잘못과 죄를 다 짊어지셨다. 그리고 다윗이 목놓아 부르짖었던 그 기도를 주님도 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다윗이 호소하였던 것처럼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이제 구원의 하나님 역사의 전면에 나와 달라는 호소다. 세상의 불의와 부패함을 척결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달라는 호소다. 매일같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며 드리는 주기도문이 이제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다. 


세상의 정치가, 권세자들에게 이제는 더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께 호소한다. 세상 권세자들은 너무 많이 먹어 눈이 툭 튀어나올 정도이고, 그들의 거만함은 꺽일 줄 모른다. 부정함으로 거둬들이는 돈은 쌓을 곳이 없다.(시73:7-9) 그들에게 정의와 공의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정의와 공의를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주옵소서. 

그리고 약한 자들, 억눌린 자들, 병든 자들,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옵소서.”

다윗의 기도나 예수님의 기도는 동일하다. 


오늘 우리의 기도도 동일하다. 

“하나님! 이 조국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더는 세상의 정치가에게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정의와 공의를 세워주옵소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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