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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Dec 29. 2016

미소를 선물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훌륭해서일까? 절대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흔히 히브리(Hebrew) 민족이라고 하는 데 그 뜻은 ‘가로 지르다.’,’건너가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큰 강 유브라데를 건너왔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떠돌이)로 소개하였다. (창23:4) 히브리란 말은 ‘하비루’(Habiru)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하비루는 기원전 2천 년 전 고대 근동 지방의 방랑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노예, 범법자, 이방인, 나그네들을 일컫는다. 이스라엘은 노예였고 애굽에서 나올 때 수많은 잡족 노예들도 함께하였다.(출12:38) 이스라엘 구성원은 사회 최하층 노예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절대 훌륭하지 않다. 도덕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기준 미달이었다. 막말하자면 인간쓰레기 같은 존재들이다.


구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인도하심을 자주 경험한 족속도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거역하고, 배신하였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짓만 골라서 하였다. 우상숭배는 기본이고,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악행을 밥 먹듯이 저질렀다. 엽기적인 범죄, 사이코패스, 성적인 문란함은 기가 질릴 정도다. 초대 교회 말시온(Marcion, 100~c160) 같은 사람은 구약을 읽으면서 이건 성경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구약 성경은 버려야 하고, 히브리 민족과는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시온 이후 기독교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사람은 어김없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언급한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자기 민족이 저지르는 온갖 만행과 추악한 범죄에 혀를 내두른다. 이런 나라는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위선적인 신앙생활에 고개를 외면하였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가 역겨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기로 작정하였다. 선지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에게 저주와 멸망을 선언하였다. 자기 민족을 향하여 심판을 선고하는 선지자들의 아픔과 눈물과 고민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내가 선지서를 읽으면서 놀란 것은 심판과 저주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이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보더라도 멸망할 나라고, 저주받은 나라고, 없어져야 마땅한 나라인데 선지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는 예레미야도 희망을 노래하였다.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렘30: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렘31:13)

선지자의 희망은 이유 없는 희망이다. 거의 막무가내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정신 차리고 뭉쳤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렘30:11)


선지자의 희망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께서 뜨내기요 떠돌이 같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하여 주었듯이, 이제 바빌론의 손에서 그들을 다시 구원하여 주시 것이라는 믿음이다. 처음 이스라엘을 선택할 때도 값없는 은혜로 하였던 것처럼, 바빌론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어찌 보면 정말 무식하고 무지막지한 믿음을 가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비록 지금은 죽을 자리, 망할 자리, 저주받은 자리, 사람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자리에 있어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희망을 가진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진다.


나치 유대인 수용소 벽에 누군가 시 하나를 적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을 믿습니다.

주위에서 사랑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침묵 속에 계신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매일같이 친구들이 가스 실에 들어가서 시체가 되어 나온다. 다음번에는 자기 차례가 될는지도 모른다. 이름도 없이 번호로만 불리는 존재들. 언제 죽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그들.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수용소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순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희망을 가진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탈무드에서 랍비 이츠하크(Itshak)는 “구세주는 구원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아 우리가 절망에 빠지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고 하였다. 운명의 부조리함과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여 작품을 쓴 유대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이런 말을 하였다. “구세주는 더는 필요하지 않을 때 온다. 세상의 마지막 날에도 오지 않고 마지막 날 다음 날에 나타날 것이다.” 1) 유대인은 깜깜한 절벽에 부딪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오히려 희망을 가진다. 그들이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버텨온 이유다.


얼마 전 어느 분이 대표기도하였다.

“하나님! 정말 힘이 듭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상황을 조금 알기에 그 기도가 가슴 깊이 다가왔다.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해 봐도 하나님은 얼굴을 가린 채 말이 없다. 하는 일마다 꼬여서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보면 절망할 것밖에 없다.


정부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2.6%에서 2.3%로 하향 조정했다. 외환위기 여파가 몰아쳤던 1999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 2%대로 떨어졌다. 보통 정부가 전망치를 잡을 때는 좋아질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조금 높게 잡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내년도 실제 경제성장률은 2%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할 사령탑은 기능을 상실한 가운데, 최악의 상황이 예상된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 사람의 얼굴에 표정이 없어 무뚝뚝하다고 하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난 표정으로 2017년을 맞이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희망을 위하여 희망을 가지련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인생을 택하여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희망을 주셨던 하나님을 믿는다. 버러지 같은 인생에게 세상 그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고,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 아니 추악한 죄악으로 가득한 그들에게 소망을 두셨던 하나님은 정말 놀랍다. 인간의 모습은 '절대 아니올시다.'이지만 하나님은 고집스럽게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만드실 것이라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였다.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희망이 실제 이스라엘 나라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할례받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에 할례받은 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최악의 상황, 나치 수용소에서도 희망을 가졌던 유대인보다 더 큰 희망을 가져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기뻐하라! 는 하나님의 명령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삶을 버텨내기가 너무 힘겹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아도 견뎌야 한다.


십수 년 전 온몸에 암이 퍼져 죽어가던 한 여집사를 기억한다.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몸은 비쩍 말라 마른 가지 같았다. 병문안을 갈 때마다 무슨 말로 위로 할까 고민하였는데, 언제나 나에게 환한 미소로 먼저 맞이해 주었다. 분명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그 여집사는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았다.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웃음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렵고 힘들 때 당신도 나처럼 남들에게 “미소를 선물하라!”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너무 괴로워 밤새 눈물 흘릴 때도 있었다. 딱 죽고 싶을 때 나는 그 여집사님이 내게 보여주신 미소를 떠올렸다. 그건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내게 주신 선물이다. 2017년 분명 쉽지 않은 한 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2017년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미소를 선물하리라 결심한다.


“미래는 또 다른 세상이다. 미래와의 관계란 또 다른 세상과의 관계를 뜻한다.” - 레비나스


주(註)

1. 희망에 미래는 있는가 / 로제 폴 드루아, 모니크 아틀랑 공저 / 김세은 옮김 / 미래의 창 / 2016년 /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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