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Dec 31. 2016

루터의 양심고백

종교개혁 500주념 기념 시리즈 4

보름스로 가는 길은 지옥으로 가는 것 같았다. 1517년 면죄부 판매에 항의 글을 쓴 이후로 3년 동안 루터는 고민이 많았다. 가톨릭은 지금까지 성경에만 근거를 두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교회의 전통과 예식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신뢰할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1500년 전통을 내세워 루터를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너만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성경 해석이 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1500년 교회 전통을 무시하는 너야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다.”


보름스로 가는 도중 루터는 심한 열병으로 고생하였다. 몸과 마음이 탈진하여 동료들은 그의 생명을 걱정하였다. 이미 교황의 칙서(Exsurge Domine)가 발표되었고, 파문당할 위험은 자명하였다. 교황에게 파문당하면, 루터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다. 보름스로 가는 도중 그의 책 몰수령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종교재판 열기를 주장하던 사람은 카예탄과 엑크였다. 엑크는 루터를 스페인 종교재판에 보내야 한다고 황제에게 강력히 요구하였다. 완고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종교재판에 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보름스로 가는 도중 루터가 얼마나 마음 졸이며 걱정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겪었던 우울증이 재발하여 고생하였다. 그의 편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는 몹시 동요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희망, 때로는 절망이 지배합니다.” 루터는 죽음도 각오하였다. 비록 황제가 안전통행증을 발급하였지만, 체코의 얀 후스도 황제의 통행증만 믿었다가 결국 화형당해 죽은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름스로 가는 도중 루터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야 했다.

“나는 진실을 말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비록 스무 번 죽는 결과가 될지라도.”

공포에 사로잡힌 루터는 주문처럼 반복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면서 교계나 학계의 사람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평민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글을 써서 일반 백성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고자 하였다. 평민을 대상으로 쓴 그의 글은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잠자던 독일 백성이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사실 독일 교회와 교인들은 로마 교황에 대해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면죄부 판매 수입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수입이 로마로 흘러들어가 교황의 사치 생활, 정치적 음모, 성당 건축에 사용되었다. 로마 당국자들은 독일 백성이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고통받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14개 교구 가운데 담당 주교가 사역하고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주교나 추기경들이 이름만 걸어놓고 모두 로마에 살고 있었다. 상(Sens)의 대주교 앙트안느 뒤 프라(Antoine du Prat)는 자신의 교회에 딱 한 번 출석했는데, 그날은 곧 자기 장례식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교계 지도자들은 가문의 인맥이나 정치나 돈에 의해 임명되었다. 사보이(Savoy) 공작 아마데우스 8세(Duke Amadeus VIII)는 1451년 그의 아들을 제네바 수석 주교에 앉혔는데 그는 안수를 받은 적도 없는 8살짜리 꼬마였다. 1)  아무리 무지한 독일 평민이라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루터가 개혁의 깃발을 들었으니 백성의 지지는 당연하였다.


독일 백성은 루터가 지나갈 때면, 모두 나와서 루터를 연호하였다. 고향인 아이제나흐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은 그를 영웅 대하듯 환호하였다. 설교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루터가 교회 안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발 디딜 틈이 없도록 꽉 차 있었다. 머리 위에 후광과 비둘기를 곁들인 마틴 루터의 초상화는 불티나게 팔렸다. 사람들은 루터의 초상화에 키스하였다.  


백성의 열렬한 지지와 더불어 울리히 폰 후텐과 프란츠 폰 지킹겐, 프리드리히 선제후 같은 독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인물들이 루터를 지지하였다. 그들은 루터의 신학에 특별한 관심은 없었으나, 약탈자인 로마에 대하여 독일의 자주권을 펼치려 하였다. 정치가들은 독일 백성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루터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독일 카를 황제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루터의 재판은 단순히 로마 가톨릭의 문제가 아니라 독일의 문제다. 루터가 공정한 심문을 받을 기회를 가져야 하며, 그 심문은 반드시 독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 허가증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만일 타당한 이유 없이 루터를 파문하면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였다. 교황의 비위를 건드리기 싫은 카를 황제라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보름스로 가는 길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교회의 문마다 황제의 수배령과 교황의 칙서가 붙어 있었다. 루터의 책은 모두 압류되고 그의 저서를 가지고 있거나 배포하는 자는 처벌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거리에 늘어선 무리의 환호 속에는 “화형에 처하라!”는 외침도 섞여 있었다. 아무리 작센의 제후가 루터를 지지해도 보름스 제국 회의의 결론은 분명하다. 루터의 파문! 일부 친구들은 루터의 사상에 공명하고 있던 기사 프란츠 폰 지킹겐(Franz von Sickenden)이 있는 에버른부르크로 가라고 종용하였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을 때 황제의 전령마저 루터에게 말했다.

“박사님, 정말로 보름스에 가시겠습니까?”


두려움과 근심이 짓누르고 있었지만, 루터는 결심하고 또 결심하였다. 보름스 근처 뉘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일사 각오의 정신으로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다. 비록 뉘른베르크에 있는 집들의 기왓장 수만큼이나 많은 악마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모든 지옥의 문과 공중의 권세들의 뜻에 맞서 보름스로 들어갈 것이다.”

보름스로 가는 길은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1521년 4월 16일 마침내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도시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든 백작, 남작, 화려한 의상을 걸친 기사들과 귀족들, 성직자와 평민이 다 모였다. 황제를 비롯한 수천 명의 사람 앞에서 루터는 심문을 받았다. 루터는 평소대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복을 입고 깨끗하게 체발한 모습이었다. 그 앞에는 루터가 쓴 여러 권의 책이 증거물로 놓여 있었다. 엑크는 루터에게 질문하였다.

“이 책들은 모두 본인의 것이오?”

엄청난 군중 앞에 선 루터는 약간 떨리는듯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제가 쓴 것이 맞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책을 정당하다고 주장하오? 아니면 그 일부를 취소할 마음이 있소?”

루터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 분명하였다. 황제와 국회는 논의하였다. 신학교수가 여기까지 오면서 자기 뜻을 정리하지 못하고 망설이다니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황제는 자비를 베풀어 내일까지 여유를 주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온 루터에게 친구들은 절대로 굽히지 말라고 밤새 격려하였다. 그날 밤 쓴 짧은 편지에서 그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결심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저는 영원토록 단 한 부분도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날 18일, 더욱 큰 홀이 선정되었지만, 사람들이 어찌나 몰려드는지 황제 외에는 아무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심문은 시작되었고 루터는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양자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 오고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루터는 독일어로 대답했다. 에크는 라틴어로 대답하라고 다그쳤다. 루터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요. 박사님. 이미 말씀하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라틴어로 자기주장을 펼쳐 나갔다. 회의장 안에는 루터를 욕하는 소리로 가득하였다. “죽여라!”는 소리도 들렸다. 회의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루터는 손을 치켜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해냈다. 나는 해냈다!”


심문하던 트리어 대주교는 루터에게 양심을 버리라고 요구하였다. 그게 루터가 살길이라고 하였다. 보통 사람은 공포와 위협 앞에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진실을 묻어둘 때가 있다. 혹은 후안무치하게 거짓을 말하고, 모른다고 고개를 외면하기도 한다. 루터는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물리치고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말할 때 세상은 개혁된다.


종교개혁은 양심고백에서 시작하였다. 루터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지만, 그의 양심은 자유로웠다. 루터는 진리로 양심을 깨웠고, 양심으로 다시  진리를 깨웠다. 염치와 수치를 모르고 온갖 거짓과 모략과 술수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양심으로 진리를 깨우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주(註)

1. 종교개혁사상 /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최재건 옮김 / CLC / 2006년 / 25쪽









매거진의 이전글 사회개혁과 종교개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