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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02. 2017

종교개혁은 영적 민주주의?

종교개혁 500주념 기념 시리즈 5

1. 에라스무스의 종교개혁

루터가 태어나기 17년 전 에라스무스는 한 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법적으로 성직자는 혼인이 금지되었지만, 당시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 성직자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가족을 거느리는 일은 흔하였다. 성직자의 사생아라는 사실에 에라스무스는 평생 괴로워 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로서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511년에 출판한 ‘우신예찬’은 그의 생전에 39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권력자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정치고문을, 교황 바오로 3세는 추기경 자리를 제안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으로 돌아가서(ad fontes, 원천으로 돌아가자) 서구 문화를 다시 살려보자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성경을 읽으면서 그동안 가톨릭이 정본으로 인정한 라틴어 성경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1516년 헬라어 성경을 출간하고 일반 백성도 이러한 고전을 읽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을 원어로 읽어야 한다는 요구는 유럽 전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바로 평범한 대중들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화를 내실까요? 농사꾼들은 물론이고 대장장이와 석공들, 심지어 창녀나 포주, 터키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중얼거리는 라틴어보다 이해 가능한 자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로마 가톨릭이 구원의 징표로 가르쳤던 면죄부, 성지순례,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그들이 행하는 의식과 절차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읽고 개인적인 경건 생활 특히 기도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스승과 같았다. 루터는 독일어 성경을 번역할 때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텍스트로 삼았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높은 존경과 찬미를 당신에게 드리는 바이오.” 에라스무스 역시 루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루터의 대의가 멋지게 성공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하시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부패를 도려내기 위해 루터와 같은 수술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다면, 그(루터)에게 반대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2) 그래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았다면, 루터는 그의 알을 부화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밀월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라스무스는 대학자답게 자신의 탁월한 지식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과 대화와 소통, 타협과 설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공격수였다. 3) 둘은 성격과 기질상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다. 루터가 1517년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글을 썼을 때까지만 해도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에 대하여 치열한 공격성을 보이는 루터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 이성을 높이 평가하는 인문학자로서 이성을 기준으로 성경을 비평하였다. 그는 사물의 본질은 인식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자였다. 사실 종교개혁 시대 전까지 성경은 본질상 애매모호한 책으로 인식하였다. 가톨릭은 성직자의 도움 없이 일반 평신도가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을 읽다가 오해하여 이단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1080년경부터 로마 가톨릭은 평신도가 성경 보는 것을 금하였다. 가톨릭은 평신도도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왈도파, 이탈리아의 롤라드파, 체코의 후스파를 모두 이단으로 간주하여 화형에 처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호성을 주장하는 면에서 에라스무스는 가톨릭적이었다.


2. 루터의 종교개혁

그러나 루터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성경의 의미는 명료하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성서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없고 의미가 애매모호한 것도 없다. 성서에 있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밝히 드러나고 모든 세상에 분명히 선포되었다.” 4)


루터가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때까지 중세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경 해석 독점권을 교회에 주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어떤 사람도 교회의 성경해석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 성경은 애매모호한 면이 많아서 교회가 정해준 해석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가톨릭의 주장을 깨트리기 위하여 다양한 공격을 하였다.


먼저 성경 해석 독점권을 교황이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교회 공의회가 가지고 있느냐를 따졌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하여 칼케돈 공의회, 에베소 공의회 등 여러 공의회에서 성경 교리를 확정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공의회를 교회나 교황이 소집한 것이 아니라 세속군주인 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을 보아서 기독교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평신도도 얼마든지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5)'성경 해석 권한이 교황에게 있느냐 교회 공의회에 있느냐?'하는 문제는 가톨릭 내부에서도 오랜 논쟁거리였다. 공의회 주의자로 랑엔슈타인의 하인리히(1325~1397), 장 제르송(1363~1429), 니하임의 디트리히(1345~1418), 존 메이저(1467~1550)와 에라스무스(1466~1536) 같은 사람이 있다. 6) 당시 교황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문학자는 교회 공의회에 성경 해석권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루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였다. 만인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수도사로 사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이란 주장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의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7)

여기서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충돌이 생겼다. 로마 가톨릭 지도자들은 불가지론을 주장하는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대적할 적격자라고 생각하였다.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공격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가톨릭의 지속적인 압력에 마침내 에라스무스는 굴복하여 루터에 대한 반박 글을 썼다. 1524년 9월 초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rio diatribe sive colatio)을 출판했다.

성경에는 확실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깊이 접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고자 시도하면 무지가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탐구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신적인 지혜의 위엄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영의 연약함을 인식하게 된다.” 8)

안타깝게도 에라스무스는 성경의 명료성을 공격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가톨릭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는 더 좋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 이 교회(중세 가톨릭)와 함께할 것이다.”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에라스무스는 단지 도덕적인 개혁만 바랐을 뿐이지, 교리적인 문제까지 개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면에 루터는 신학 원리를 개혁하지 않고,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만 약간 고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대하여 극렬한 표현을 써서 반론을 제기하였다.

“성경 속에 난해한 것이 들어 있고 모든 내용은 명료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불경건한 궤변론자들이 만들어낸 사상인데, 에라스무스여, 그대 역시 그들의 입술을 빌려 여기서 말하고 있다.”

“물론 나는 성경 속에 모호하고 난해한 구절들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것은 그 본문이 다루는 주제가 거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어휘와 문법에 우리가 무식한 탓이다. 그 구절들은 성경의 주제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루터에게 있어 성경의 명료성은 종교개혁의 중심 원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저돌적으로 에라스무스를 공격하였다.

“에라스무스를 으깨 버렸다면 그건 빈대를 눌러 죽인 거다. 그놈의 빈대는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악취를 풍긴다.”

그는 에라스무스를 그리스도의 가장 지독한 적이라 불렀다. 10)


루터를 공격하는 용도가 끝나자 가톨릭은 에라스무스를 정죄하였다. 에라스무스의 불가지론은 교황의 성경 해석권을 거부하는 이론이기에 그는 숙청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죽은 지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가 작업한 헬라어 성경은 트렌트 공의회에서 저주를 받았다. 교황 바오로 4세는 ‘모든 이단의 우두머리’로 에라스무스를 지목하고 그의 전집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11)


루터는 가톨릭 교회에 성경 해석 결정권을 주지 않기 위하여 성경의 명료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정말 멧돼지처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전진하였다. 루터는 모든 사람에게 성경 해석의 권한을 줌으로써 영적 민주주의를 열었다. 이제부터 누구라도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도 있다. 누구라도 제멋대로 오역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루터의 주장은 개신교 안에 각종 이단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교파 분열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성경은 경전이라기 보다 아무나 멋대로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에 불과하게 되었다. 영적 무정부 상태가 도래하였다.


3. 칼빈의 종교개혁

누가 성경 해석의 문제를 결론지을 것인가? 종교개혁가들 사이에 큰 문제가 되었다. 루터보다 30년 정도 늦게 태어난 제2세대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루터의 개혁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가 쓴 ‘기독교강요’는 성경 해석이 중구난방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칼빈은 자신이 쓴 ‘기독교 강요’를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한 권위 있는 지침서로 제시하였다.12)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자 거룩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켜 이들이 하나님 말씀에 쉽게 다가가고 어려움 없이 그 말씀 안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칼빈은 일관되고 통일성 있는 신학 체계를 성경에서 끄집어내 기독교 강요에 기록하였다. 그는 성경이 기독교의 믿음과 구조를 견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음을 실증하고 교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수많은 종교개혁자가 제네바의 칼빈을 찾아왔다.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본산이 되었다.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은 영국의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성경의 성격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하였다.

“성경 속의 모든 내용이 하나같이 명료한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성경 여기저기에 극히 명확하게 제시되고, 또한 개방되어 있어서 학식 있는 자들뿐 아니라 무식한 자들도 일상적인 수단을 적절히 사용하면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해석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을 제어할 필요성을 느끼고 신앙고백의 형태로 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많은 요리문답과 신앙고백, 신조가 나오게 되었다. 제네바 요리 문답(1541), 프랑스 신앙고백(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벨직 신앙고백(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스위스 일치 신조(1679)가 있다.


종교개혁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먼저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주장한 대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에서 종교개혁이 촉발되었다. 루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하며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성경의 명료성이 가지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신앙고백이라는 교회 공동체의 결론을 성경 해석의 가이드로 제시하였다. 개신교는 우여곡절을 무수히 겪으면서 개혁 정신을 이어왔다.


주(註)

1. 2천년 동안의 정신  / 폴 존슨 지음 / 김주한 옮김 / 살림 / 2005년 / 349쪽

2. 에라스뮈스 / 요한 하위징아 지음 /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 333쪽

3. 멧돼지 사냥을 즐기던 교황 레오 10세는 마틴 루터를 파문하는 파문장 서두에 이렇게 썼다.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 멧돼지가 거룩한 포도원을 파괴하고 있나이다.” 교황이 볼때 루터는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멧돼지와 같았다. 어떤 면에서 루터에게 그러한 성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4. 마틴 루터의 신학 / 베른하르트 로제 지음 / 정병식 옮김 / 한국신학연구소 / 2002년 / 238쪽

5.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 앨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박규태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 / 2012년 / 93쪽

6. 개혁의 주창자들 : 위클리프부터 에라스무스까지 / 백충현 씀 / 목회와 신학 2010년 9월호 / 두란노 / 206쪽  그러나 공의회주의자들의 노력과 분투에도 불구하고,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오류성을 확정함으로써 교황주의가 승리한다.  

7. 교회는 성경을 오석해 왔는가 / 모세 실바 지음 / 심상법 옮김 / 솔로몬 / 2002년 / 125쪽

8.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 칼-하이츠 츠어 뮐렌 지음 / 정병식, 홍지훈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5년 / 156쪽

9. 교회는 성경을 오석해 왔는가? / 132,133쪽

10. 에라스무스 평전 /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정민영 옮김 / 아롬미디어 / 2008년 / 225쪽

11. 2천년 동안의 정신 / 344쪽

12.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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