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9
중세 말 1337년 플랑드르 지역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길고 긴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려 116년 동안 지속한 전쟁이었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각자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백성은 고통스러웠다. 지긋지긋한 전쟁의 와중에 흑사병까지 돌았다. 1348년 처음 발생한 흑사병은 1361년, 1373년, 1380년 연속적으로 프랑스를 덮쳤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전쟁과 흑사병으로 죽었다. 백성이 고통받건 죽든 권력자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전쟁을 이어갔다. 사람들 사이에는 종말론과 신비주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상은 끝이 나겠구나!”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끔찍한 세상을 끝낼 힘이 없던 백성은 주님의 재림과 심판만을 사모하였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즐거움을 주었던 것은 탁발 수도회에 속한 순회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하층민들이 쓰는 비속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설교하였다. 신학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로 실제적인 도덕에 대해서 설교하였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부자들, 제후들, 고위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설교를 듣는 백성은 속이 다 시원하였다. 불만은 점점 고조되었다.
지식층도 인문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루터가 비텐베르그 교회에 95개 조항을 붙이기 9년 전 1508년 파리 대학의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Etables, c1450~1537)교수는 원어 성경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원전 연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수도원이 몰락하고, 경건한 신앙이 소멸하고 사람들이 천국의 행복보다는 지상의 부귀만 바라게 되었다.”
그는 대담하게도 구원은 신앙으로 얻는 것이지 헌금이나 면죄부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최고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며 미사는 상징적인 본질일 뿐이다. 라틴어로 하는 기도, 사제의 독신제도, 성자 숭배 등은 잘못이다. 그는 불어 성경도 간행하였다.(1523) 역사가 미슐레(Jules Michelet, 1793~1874)는 르페브르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존경하는 르페브르는 루터보다 9년 앞서서 파리에서 루터주의를 가르쳤다.” 1)
르페브르가 이렇게 개혁적인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뒤에 프랑수아 1세의 누이인 마르그리트(Marguerite d’Angouleme, 1492-1549)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후일 위그노(Huguenot 프랑스 개신교도)의 여왕 쟌 달브레(Jeanne d’Albert of Navarre, 1528-1572)의 어머니다. 마르그리트는 개혁 사상에 심취하여 개혁적 성향을 가진 주교 기욤 브리쏘네(Guillaume Briconnet, 1470~1534)를 종교지도자로 모시고 있었다. 브리쏘네의 지도로 모(Meaux) 지방에 개혁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후일 칼빈과 함께 제네바 종교개혁을 주도한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도 참여하였다. 이곳은 프랑스 종교개혁 사상이 발아하는 중요한 진원지가 되었다. 2)
마르그리뜨의 딸 잔 달브레 27살 때 자기 어머니를 회상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여러 해 전 (나의 어머니가) 후슬과 파렐 등의 목사들과 더불어 그녀의 방에서 기도하던 그 시절 … 부친과 영주들에게 받았던 모진 괴롭힘을 나는 잘 기억한다. 그는 어머니의 뺨을 때렸고 그녀를 교리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으며, 나를(6살) 향해서는 막대기를 휘둘러서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마르그리뜨는 파렐과 칼빈(John Calvin)과 베자(Theodore Beza)에게 임시 도피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3)
드디어 프랑스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마르그리뜨의 오빠인 프랑스와 1세(François Ier,1488~1576)는 종교개혁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1534년 가톨릭의 미사와 화체설을 비난한 격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격문은 프랑스와 1세의 침실 문에까지 붙여졌다. 이 때문에 왕은 분노했고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535년 파리에서 프랑스와 1세가 자리한 가운데 32명의 개신교도가 화형에 처해졌다. 수백 명이 제네바로 도망쳤다. 4)
1540년부터 제네바의 칼빈이 프랑스 종교개혁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칼빈은 루터나 츠빙글리처럼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프랑스인이었기에 더 설득력이 있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프랑스어판 1541), 제네바 신앙교육서(1542), 제네바 권징서(1541), 시편 찬송(1562)을 연이어 출간하였다.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목사들을 양성하였는데 그들은 선교 정신과 개혁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하였다. 1555년부터 1562년 사이 칼빈은 88명의 목사를 프랑스에 파송하였다. 1555년 칼빈의 권면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파리 교회는 장 르 마송(Jean Le Maçon)을 목사로 선출했다. 5) 뒤이어 프랑스 남부 대도시마다 개혁교회들이 세워졌다. 1560년대 초 약 2천 개의 교회가 세워졌고, 교인은 2백만에 육박하였다 이는 당시 인구의 약 12%에 해당한다. 그들 대다수는 장인이나 전문 직종의 사람이었고 프랑스 남부 대도시나 중소도시에 살았다. 6)
프랑스 개혁교회가 성장하는 만큼 가톨릭의 핍박도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1545년 고등법원은 카브리에르와 메랑돌르 두 촌락을 이단이라 규정하고 마을을 공격하였다. 24개 촌락에 3백여 채의 가옥이 불타고 3천 명의 촌민이 학살당하였다.7) 1546년에 모(Meaux)에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14명이 화형을 당했다. 1547년 특별 재판소가 설치되고 600명의 개신교도가 십수 년 사이에 처형되었다.
1572년 8월 18일 발루아 왕가(가톨릭)의 마르가레따와 개혁파의 부르봉 왕가인 나바르의 앙리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결혼은 화해의 표시였다. 그러나 화해는 일주일도 못가 깨졌다. 가톨릭은 8월 24일 바돌로매 성일을 기해 안심하고 있는 위그노들을 학살하였다. 밤 1시 생제르맹 록세로아의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학살극이 진행되었다. 암살단은 개혁파 지도자 콜리니의 침실에 뛰어들어 그를 찌르고 시체를 창문 밖으로 집어 던졌다.8)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미리 대상자 명부가 준비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3, 4천 명에 달하는 위그노가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지방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대략 2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타방느 장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파리는 정복을 당한 도시와도 같았다. 유혈이 멎자 약탈이 시작되었다. 왕후, 영주, 귀족, 사수, 경비병 등 모든 신분과 직업의 사람들이 민중과 함께 떼를 지어 거리에서 약탈 살육을 감행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감사 찬송(Te Deum)을 불렀다.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는 축사를 보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쁜 일 중 하나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참을 수 없었다. 칼빈은 오래 전부터 무장 봉기에 대하여 반대하였지만 위그노들은 칼빈의 제자인 베자에게 문의하였다. 프랑스 상황은 심각하였고, 개신교는 무작정 당할 순 없었다. 베자는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에서 무력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4권 20장에서 왕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세워진 관리들이 있다면, 왕의 폭정에 항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는 ‘법관의 원리’(1574)에서 통치자는 사회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므로 만일 통치자가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남용한다면, 통치자의 기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 구성원은 합법적으로 독재자에게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9) 프랑스 개혁교인(위그노)들은 베자의 저항이론에 근거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었다. 이후로 계속된 종교전쟁은 낭트 칙령이 발표되기까지 36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낭트 칙령(1598)은 위그노를 정식 국민으로 받으며 제한적인 범위에서 예배의 자유를 주었다.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고, 두 종교 사이의 평화적 공존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1610년 왕이 탄 마차가 라 페롱네리 가를 통과할 때 한 사나이가 마차에 뛰어올라 편지를 읽느라고 정신을 팔고 있는 왕을 찔렀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통합을 위해 힘을 썼던 앙리 4세(잔 달브레의 아들)는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었다.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암살자 라베일라크는 공범도 없는 정신병자라고 하였지만, 당시 왕을 암살할 음모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앙리 4세의 죽음으로 다시 위그노를 향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1659년 이후 위그노의 전국대회 소집은 금지되었고, 지역대회는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700개의 교회가 붕괴되었다.
1685년 기어이 낭트 칙령은 취소되었고 위그노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모든 위그노 지도자들은 14일 이내에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몇 주 안에 8,000여 군데의 교회가 폐쇄되었다.10) 25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신대륙의 식민지, 프로이센으로 빠져나갔다. 프랑스에 남은 위그노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가톨릭의 핍박 아래 위그노들은 성경을 아주 작게 만들어 집안 벽장과 부인들의 머리 장식에 숨겨가며 읽었다. 아이들은 7살이 되면 강제로 가톨릭 학교에 들어가야 했는데 위그노들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하여 4살부터 글을 가르쳤다.11) 1787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 그들은 온갖 핍박을 받았다. 프랑스 개신교는 200만에서 60만으로 줄어들었고, 현재는 전 국민의 1%만이 개신교인이다.
1. 프랑스사 / 앙드레 모로아 지음 / 신용석 옮김 / 홍성사 / 1987년 / 155쪽
2.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 김재성 지음 / 이레서원 / 2001년 / 95쪽
3. 신실한 위그노 여왕 / Paul Christianson 지음 / 오창윤 옮김 / 진리의 깃발 36호 / 1999년 / 13쪽
4. 위그노 : 프랑스 개혁파 신자들 / 조병수 지음 / 종교개혁 기념강좌 493호 / 신반포중앙교회 / 2010년 / 85쪽
5. 종교개혁 / 리샤르 스토페르 지음 / 박건택 옮김 / CLC / 1996년 / 103쪽
6. 기독교회사 하 제4판 / 윌리스턴 워커 지음 / 송인설 옮김 / 크리스차챤다이제스트 / 1996년 / 113쪽
7. 프랑스사 / 앙드레 모로아 지음 / 158쪽
8. 종교개혁사 / 루이스 W. 스피츠 지음 / 서영일 옮김 / CLC / 1988년 / 355쪽
9. 프랑스 종교개혁의 실패원인에 대한 연구 / 김명윤 지음 / 장로회 신학대학교 석사논문 / 2002년 / 28쪽
10. 순례하는 교회 / E.H. 브로우드벤트 지음 / 전도출판사 / 1995년 / 284쪽
11. 특강 종교개혁사 / 황희상 지음 / 흑곰북스 / 2016년 / 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