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Jan 14. 2017

루터의 식탁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0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는 인간 마틴 루터를 “이해하기 어렵고 거의 가까이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수많은 전기 작가가 루터의 전기를 썼고, 수많은 신학자가 루터에 대한 논문을 썼지만, 루터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에 남아 있다. 그만큼 그는 복잡한 시대에 살았고 시대의 물음에 거침없는 말과 글을 쏟아놓았다. 그런 면에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신학을 정립한 칼빈과는 대조적이다. 생활 속에, 식사 중에 했던 말들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한 것이 바로 탁상담화다. 대화의 주제는 다양하였다. 신학은 당연하거니와 엘베 강의 개구리에서 돼지, 임신, 정치, 우울증, 인물평, 농담, 예언, 꿈, 고민, 교황 등 못 다루는 것이 없었다. 대화의 형식은 문답식이 주로였지만, 충고, 권고, 교훈, 지시 등도 있었다.

탁상담화는 출판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세련되지 못하고, 정제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 루터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루터는 언제나 자신의 약함과 판단의 실수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치 바울이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하였던 것과 같다. 자신의 인간적인 나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이야기함으로 탁상담화의 대화는 거리낌이 없었다.


루터는 옛 어거스틴회 수도원에 살았는데 커다란 수도원에 신학생들이 함께하였다. 출판된 탁상 담화는 말년에 대화한 부분이다.(1530년~1546년) 그가 젊었을 때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든 1517년부터 평균적으로 2주마다 한 편의 논문을 썼다. 그러나 그는 글쟁이 이전에 말쟁이였다. 그가 했던 설교들과 말들이 주옥같았는데 모두 기록되지 않은 게 아쉽다.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말은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케 하기도 하고, 때로 흥분시키기도 하고, 때로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루터는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식탁에는 개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였기에  대화 중에 감탄과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루터의 탁상담화는 보통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함께 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루터의 식객 가운데는 필립 멜랑톤, 요한 부겐하겐, 요한 포스터, 비투스 디트리히, 유스투스 요나스,  크루시겐, 콜다터스 등 이었다. 모두 당대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고 전문가들이었다. 루터는 그 모임을 “산헤드린”이라고 불렀다. 식탁에는 루터의 집에 하숙하는 학생들과 가족이 같이 하였다.  학생들은 식사 때를 교육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필기도구를 들고 와서는 루터와 신학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받아 적었다.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Katharina von Bora, 1499~1552)는 이들에게 수강료를 따로 받는 게 옳지 않을까 하였다. 종교개혁은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성숙하여 졌다.


루터의 식탁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대화는 성경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지낼 때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522년 9월 처음 성경을 출판하였지만,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수정하였다. 그가 운명하기까지 신구약 완역 성경이 10판, 신약성경은 80판이 출간되었다. 그 모든 성경이 단 한 번도 그냥 찍어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수정하고 교정하여 출판하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이 바로 독일어 성경 번역이었다.


루터는 가끔 단번에 적절한 번역을 하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어느 때는 죽을 고생을 했다. 그는 먼저 원전의 단어 순서에 따라 직역을 하였다. 그다음에는 단어 하나하나를 따로 뽑아서 거기에 비슷한 말을 있는 대로 다 늘어놓았다. 여기서 그는 가장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균형과 운율에 맞는 단어를 골랐다. 그다음은 의미가 통하고 쉽게 읽히도록 자유 역(의역)을 하였다. 최종적으로 직역과 의역을 통합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보석의 이름을 번역하려고 작센의 선제후 궁중 보물을 다 뒤지기도 했다.


루터는 평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으로 번역하고 싶었다. 그는 번역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 있는 어머니와,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시장에 있는 보통 남자와 이야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관찰한 뒤 그들이 말하는 방식에 맞추어 번역해야 한다.”

그렇게 번역한 성경은 독일인에게 사랑받는 책이 되었고, 표준 독일어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루터 성경은 하나의 언어적인 예술 작품이고, 독일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일반 사람의 언어는 하나님의 언어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천한 것은 아니다." 루터의 번역 원칙이었다.


그가 번역에 가장 크게 의존했던 것이 탁상담화였다. 그는 언어의 전문가인 멜랑톤(Philip Melanchtho, 1497~1560)에게 자신이 번역한 것을 샅샅이 검토하게 하였다. 바르트부르크에서 처음 번역한 신약성경을 검토해달라고 부탁한 사람도 멜랑톤이었다. 1539년 여름부터 1541년 초까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식사 전에 그가 산헤드린이라고 부르는 전문가 집단을 소집하였다. 그들은 더욱 더 철저한 번역을 하기 위하여 심도 있는 토론을 하였다. 헬라어 성경, 히브리어 성경, 라틴어 성경, 이전에 번역된 독일어 성경 등을 살피며, 그들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누가 성경 해석에 서툰 면을 드러내어도 모두가 용납하고 함께 떠들고 웃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몇 시간씩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앞서 출판된 성경을 철저히 살펴보았다. 때로 유대인들의 의견도 들었고, 외국어 전문가들의 의견도 들었다. 구약에 양을 제물로 드리는 부분이 나올 때는 직접 도살장에 찾아가서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 루터 성경은 협력 작업을 통해서 완성하였다.


탁상담화가 언제나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유쾌한 농담이 오가기도 하였고, 주책없는 꿈 이야기도 하였다. 아무렇게나 몇 가지 예를 들어보아도 그때 식탁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수도사들이란 전능하신 하나님 털 코트의 벼룩들이다.”

“나는 교황의 한 기둥이다. 내가 없어지면 그는 더 처량하게 될 것이다.”

“1532년에 이 세상이 끝난다는 소문이 꼬리를 잇고 있다. 그게 오래 가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 있어서 지난 10년은 하나의 새로운 100년으로 보인다.”

“나를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풍자한 만화가 나와 있다. 머리가 하나밖에 없는 데도 당해내지 못하는데 그쯤 되면 가히 무적일 수밖에.”

“남들은 나를 하나의 고정된 별로 만들려고 한다. 나는 정처 없는 행성인데도.”

“인쇄는 온 세상에 참 종교를 전파하는 하나님의 최신, 최선 작이다.”

“개야말로 가장 충실한 동물이다. 숫자가 더 적다면 더 칭찬을 받을 거다.”

루터는 사단과 씨름한 것을 얼마나 장황하게 늘어놓던지 그런 체험을 못한 사람은 이야기에 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가끔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도 대화에 끼곤 하였다.


학생들이 기록한 탁상담화는 라틴어(80%)와 독일어가 불규칙하게 혼용되었다. 문장은 완결되지 않은 것이 많았으며,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문장도 있었다. 대개는 즉석에서 기록하였으나, 더러는 후일 기억에 의존하여 수록한 것도 있다. 루터 사후 20년이 지나도록 인쇄된 탁상담화는 하나도 없었다. 루터의 집에 하숙했던 아우리파벨(Johannes Aurifaber, 1519~1575)은 루터의 탁상담화가 사라져가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의 기록과 자기의 기록을 모아서 1566년 처음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큰 호응을 받아 여러 번 재인쇄 하였다.

루터의 탁상담화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노를 사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탁상담화를 모두 수거하여 소각하고, 그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까지 화형에 처하겠다고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유럽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60년이 지난 1626년 카스파르 반 슈파르는 자신의 집터를 파던 중 리넨 천에 말린 채 밀랍으로 봉해져 있는 탁상담화를 발견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하고 독일어를 잘 아는 영국의 헨리 벨(Captain Henry Bell)에게 보내었다. 헨리 벨이 번역한 탁상담화는 1646년 영국 하원의 지시로 햇볕을 볼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1743년 발흐 판(Halle Ausgabe) 루터 전집에 포함되어 인쇄되었는데 호페 박사(Dr. R. Hoppe)가 치밀하게 정정하였다. 루터의 바이마르 전집(Weimarer Ausgabe, 1912년)에 탁상담화는 6권 7075종목의 담화문이 수록되었다.


그의 탁상담화는 전체적으로 보아 루터의 중심사상을 명확하게 표시하였는데 이 기록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은 없다고 루터 학자 스미스(Preseved Smith, 1880~1941)는 말하였다. 프루우드(Froude)는 "루터의 탁상담화를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의 하나이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같이 중요한 책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지원용 씨가 편역한 1977년 판 탁상담화를 가지고 있다. 짤막짤막한 글들을 읽노라면 루터의 열정, 루터의 정신을 느끼며 그의 식탁 한 귀퉁이에 자리한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참고도서

1. 말틴 루터 탁상담화 / 지원용 역편 / 대한기독교서회 / 1977년

2.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 / 헤이코 오버만 지음 / 이양호, 황성국 공역 / 한국신학연구소 / 1995년

3. 마틴루터의 생애 / 롤란드 베인톤 지음 / 이종태 옮김 / 생명의 말씀사 / 1982년

4. 루터의 사상 신학과 교육 / 지원용 지음 / 컨콜디아사 / 1977년

5. "루터성경의 사회문화사" / 최경은 씀 / 독일언어문학 제 54집 / 2011년


매거진의 이전글 저항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