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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23. 2017

잊혀진 종교개혁자, 칼슈타트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6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성공했을까? 중세 로마 가톨릭의 부패함과 타락에 개혁을 외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000년의 권세를 가진 가톨릭에 저항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요인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와 지지 때문이었다. 사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열렬한 가톨릭교도였다. 당시 독일은 아직 민족국가로 자리 하지 않았지만,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이 변방의 독일을 착취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선제후의 정치적 판단 덕분에 루터는 힘있게 종교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종교개혁 운동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공권력에 도움을 받는 종교개혁(Magisterial Reformation)과 공권력을 배제한 체 순수한 종교개혁을 추진한 급진적 종교개혁(Radicals of Reformation) 그리고 세속권세와 완전히 하나 되어 진행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이다.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공권력을 어느 정도 힘입지 않고서 종교를 개혁할 수 없었음을 볼 수 있다. 급진적 종교개혁자로 분류된 재세례파 사람들은 세속의 권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종교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온갖 핍박을 당한 후 지금은 극히 소수만 남았다. 관 주도형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나 칼빈은 어느 정도까지는 세속 정부의 권한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저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바른 정치를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들은 실용주의적 종교개혁자라고 부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은 세속 권세를 포함한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교회를 개혁하였다.


처음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세속 권세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로 고민을 하였다. 비텐베르크는 온갖 종교개혁 사상이 난무하였다. 농민운동의 주역으로 급진적 성향을 보였던 토마스 뮌처, 공권력의 지지와 도움을 받아가며 천천히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실용주의자 마틴 루터, 그리고 종교개혁의 윤리와 실천을 강조했던 칼슈타트가 있었다.

칼슈타트

칼슈타트는 본명이 안드레아스 루돌프 보덴슈타인(Andreas Rudolph Bodenstein)으로서 흔히 그의 출신 지역 이름을 따라 칼슈타트(Karlstadt)라 부른다. 그의 아버지는 칼슈타트의 시장이었다. 그는 에어푸르트, 퀼른,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공부하고 1510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고, 1511년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가 되었다. 로마대학에서 1년간 법학 공부를 하고 1516년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칼슈타트는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았다. 비텐베르크에는 이제 갓 대학교수가 된 마틴 루터가 개혁 사상을 설파하고 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 사상에 의지하여 새로운 신학을 주장하였다. 칼슈타트는 루터를 반박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루터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깨끗하게 승복했다. 그것은 지난 10년 동안 이룩한 학문적 명성과 업적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비록 후배지만 루터의 사상을 인정하고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그만큼 순수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1519년 루터가 라이프치히에서 가톨릭 신학 교수 요한 엑크(Johann Eck)와 논쟁할 때 칼슈타트도 함께 하였다. 1520년 엑크는 루터와 함께 칼슈타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는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였다. 1521년 루터가 보름스 종교회의에 참석하러 떠난 후 칼슈타트는 필립 멜랑톤과 함께 비텐베르크 개혁을 이끌었다.


칼슈타트는 루터가 지금까지 가르쳤던 세 가지 개혁 사상을 실행에 옮겼다.

1. 가톨릭식 미사 폐지

2. 평신도에게 성만찬 실시(빵과 포도주 모두)

3. 성상 철폐


그는 루터가 이미 발표한 만인 제사장 설에 따라 성직자 옷을 벗었다. 1521년 12월 25일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에서 평복을 입고 복음주의적인 미사를 공개적으로 집전했다. 이 미사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이 미사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처음으로 빵과 포도주 모두를 받아먹었다. 평신도의 손으로 직접 빵과 포도주를 받게 하였다. 당시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는 수도원 서약과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젊은 여성 폰 모카우(Anna von Mochau)와 1522년 1월 19일 결혼하였다. 개혁자로서 최초의 결혼이었다. 사실 그가 실행에 옮긴 모든 것이 다 첫번째 것이다.


그는 교회와 예배실에 성상을 두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설교하였다. 성상을 위해 지불하는 막대한 돈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데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가난한 평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은 교회 안의 성상을 끌고 나와 불에 태우고 소동을 일으켰다. 칼슈타트도 예상하지 못한 격한 행동이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시의회 의원들은 몹시 걱정하였다.


1522년 3월 급히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격분하였다. 그는 폭동으로는 종교개혁을 이룰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질서 있게 진행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루터는 칼슈타트를 비난하였다. 칼슈타트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고 비텐베르크를 떠나 작은 시골 교구(Orlamünde)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목회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안디 형제”(Brother Andie)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자신은 사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새로운 평신도”라는 뜻이다. 그는 간소한 방식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빵과 포도주 모두를 나누는 성찬을 시행하며, 평신도 간의 공개 토론을 격려하고, 교회의 모든 일에 평신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시골 마을에서 복음주의적인 개혁 공동체를 이끄는 칼슈타트에게 뮌처가 연락하였다. 농민전쟁에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칼슈타트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지만, 전쟁의 바람은 올라뮌데(Orlamünde)까지 불어왔다. 루터는 뮌처와 칼슈타트가 한 패거리라 비난하였고, 작센 선제후는 칼슈타트를 추방하였다.


이후 칼슈타트는 농민반란에 연루된 자라는 누명을 쓰고 이리저리 피신하며 떠돌아다녀야 했다. 견디다 못한 그는 루터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공교롭게도 루터가 결혼한 다음 날이었다. 루터는 그에게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철회하고, 자신의 성찬론에 토를 달지 말라고 하였다. 1525년 중반부터 1529년 초까지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 주변에서 농부로, 행상인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겨우 살았다. 1529년 자신에 대한 온갖 감시와 통제에 지친 나머지 정들었던 작센주를 떠나 북부 독일에 위치한 플렌스부르그(Flensburg)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츠빙글리의 도움으로 취리히에서 목사직을 얻었다. 1534년 바젤로 이사했는데 학교를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교수가 되었다. 1541년 12월 24일 칼슈타트는 병자들을 위하여 사역하던 중 전염병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

칼슈타트(1486~1541)

칼슈타트는 비폭력주의자였고, 한 사람의 새로운 평신도로 불리기를 원하였다. 그는 작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모든 평신도가 함께하는 교회를 꿈꾸었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기독교인은 세속 권력자를 바라보며 그의 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은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실천해야 진정한 신앙이다.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알았던 칼슈타트는 진정한 종교개혁자였다.


그의 설교다.

“어느 누군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 조각된 십자가상이나 십자가 그림에 매달리라고 권면할 수 없다. 그러한 일에 어떠한 유익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참된 지식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교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강한 곳에서는, 이웃과 질서를 향한 사랑 역시도 나타난다.”


지금까지 칼슈타트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루터의 전기를 쓴 롤란드 베인튼(Roland Bainton)은 칼슈타트를 ‘종교개혁의 좌파’(der linke Flügel der Reformation)라고 하였다. 루터교 역사가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은 칼슈타트를 매우 평가절하하여 과격분자, 좌파, 이단이라 낙인찍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칼슈타트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종교개혁자 칼슈타트는 세상에서 잊혀져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참고도서

1. 앨리스터 맥그래스, 종교개혁사상, 최재건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6)

2. 카터 린드버그,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조영천 옮김,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3. 코넬리우스 딕, 아나뱁티스트 역사, 김복기 옮김, (대전: 대장간, 2013)

4. 김기련, "급진주의자들의 종교개혁 : 칼슈타트와 토마스 뮌처를 중심으로" [목원대학 논문집] vol8 (1985)

5. 김승연, "종교개혁 급진주의자 칼슈타트의 신학 연구", [호남신학대 석사학위 논문집] (2011)

6. 이한순, "루터의 종교개혁과 대 루카스 크라나흐", [미술사논단] vol3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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