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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24. 2017

타협하는 종교개혁가, 부겐하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7

중세 유럽은 빈부 격차가 심했기 때문에 거리에 거지들이 넘쳐났다.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1700년경 독일 쾰른의 인구가  4만 명인데, 그중 거지가 약 1만 영이었다. 베를린은 약 11만 명의 인구에 1만 7,000명이 거지였다. 거지들은 비참하게 보이기 위해 갓난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여인은 가짜로 임신한 것처럼 꾸몄고, 어떤 이는 간질병 환자처럼 보이려고 비누로 만든 거품을 입에 물고 거리에서 뒹굴기도 했다. 종교개혁자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였다. 

“온 천지에 거지가 가득하다. 시골과 도시의 골목길에, 성당과 시장 앞, 도시 외곽에, 수공업자나 매춘부들이 사는 곳까지 거지가 우글거린다.”


루터와 칼슈타트는 1522년 시의회를 설득하여 비텐베르크 규칙(Wittenberg Order)을 발표하였다. 이 법안의 핵심은 예배와 복지의 개혁이다. 17개 조항 중 3개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안이었다. 빈민 구제를 위한 공동 금고를 설립하고, 낮은 이자의 대출을 노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제공하며, 가난한 계층의 아이들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한 장려금을 지원한다. 기금은 폐지된 가톨릭의 수도원과 성당의 재산을 받아서 운영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성직자와 시민들이 일종의 누진세를 낸다. 비텐베르크에서 구걸하는 행위는 금지한다. 

부겐하겐

루터가 없는 동안 칼슈타트는 법안대로 시행하려고 했으나 기득권층의 반발로 시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마침내 가난한 평민들이 성상을 파괴하고 소동을 일으키면서, 칼슈타트는 비텐베르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칼슈타트의 뒤를 이어 비텐베르크의 사회복지를 실천한 사람은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1485-1558)이다. 그는 1485년 포메른(Pmmern) 지역의 볼린(Wollin)에서 태어났다. 1502년 그는 그립스발트에서 인문주의를 공부했고, 1509년 사제가 되었다. 그는 벨부크 수도원 학교 교장이 되어 인본주의와 종교개혁 사상에 빠져들었다. 


부겐하겐은 마틴 루터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1521년 비텐베르크로 유학을 왔다. 그는 곧 루터와 멜랑히톤의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비록 교수직은 제공되지 않았지만, 그는 성서해석 강의를 맡았다. 1523년 루터의 추천을 받아 비텐베르크 시립교회 초대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루터는 2살 어린 부겐하겐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영적 생활에 도움이 되고 고해를 들어줄 멘토로 생각했다. 부겐하겐은 비텐베르크 교회 담임목사로서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식에 주례를 섰고, 루터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루터의 임종을 지켜주고, 장례식도 집전하였다. 그는 수많은 성경 주석과 신학 논문을 출판하였고, 성경 전체를 저지대 독일어(Low German)로 번역했다. 


칼슈타트의 순수한 개혁과 달리 부겐하겐의 개혁은 타협적이었다. 그는 가톨릭의 성직 계급, 성례나 관습들을 용인하더라도 설교를 통하여 바르게 지도하고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종교개혁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개혁신학의 핵심인 칭의론을 가톨릭 입장에 근접하도록 만들어 개혁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이다. 


그의 타협적인 모습은 순수 종교개혁가들에게는 비판받았지만, 시의회나 작센의 선제후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어서 비텐베르크에만 머물지 않고 독일 북부 전 지역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모든 지역에 루터교를 확산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지도로 코펜하겐 의회는 1536년 루터의 가르침을 국가 종교로 도입하였다. 부겐하겐은 덴마크 국가교회를 위한 새 규정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덴마크의 왕과 여왕 즉위식에 왕관을 씌워주었고, 덴마크와 노르웨이 교회의 감독관(주교에 상응하는 직책)을 임명하였다. 


그는 단순히 루터교의 확산만 힘을 쏟은 것이 아니다. 정작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복지의 확산이었다. 칼슈타트가 법안을 만들고서도 공권력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해 실천하지 못했던 일들을 부겐하겐은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직을 만들고 규칙을 만드는 데 탁월하였다. 그는 법과 규칙을 세워 종교개혁을 효과적으로 진행하였다. 


1528년 독일 북부 도시 함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제는 부겐하겐에게 맡겨졌다. 그는 제일 먼저 교회 규칙(Church Order)을 제정하였다. 전통과 공권력을 존중하면서 그가 역점을 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주의적인 명령이었다. 빈민을 구제하고 궁핍한 자들을 차별 없이 도와야 하는 것은 교구 기독교의 책임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뤼벡(Lübeck)지역을 위한 교회 규칙(1531)도 만들었다. 


“복음과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교리만을 설교하는 돈-설교자들(money preachers)을 우리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연옥의 미사를 주장했으며 우리에게 면죄부를 팔았다.” - 부겐하겐

설교자들은 담대하게 사회복지를 호소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빈민구제를 위한 기금과, 교사와 목사들의 봉급, 교회 유지를 위한 기금을 분리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치 권력에서 설교자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빈민 구제를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궁핍할 때 다른 사람들이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것과 같이, 우리는 훌륭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 비록 우리는 이미 그들을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마지막 날에 이러한 일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 부겐하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웃지 않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도사들의 속임수나 참회 예식들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 중 어떤 것도 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명령하셨던 믿음의 참된 선행을 행하여야 한다." - 부겐하겐

부겐하겐은 신학적인 주장과 교리를 실제적이고 법률적인 결과로 연결하였다. 교회개혁은 전체 도시 공동체가 참여하여 예배를 개혁하고 학교를 발전시키며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비록 부겐하겐이 가톨릭의 관습을 깨끗이 청산하는 데는 소홀했을지 모르지만, 공권력과 잘 협조하여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였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기독교 사회윤리는 루터가 주장한 것처럼 ‘예배 후의 예배’라고 그는 외쳤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 공동체로 예배당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는 일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말 예배의 행동이자 하나님을 섬기는 행동이다. 

크랜나흐가 그린 멜랑히톤, 루터, 부겐하겐

부겐하겐은 신학자로서 루터, 교육가로서 멜랑히톤과 버금가는 사회복지 실천을 이룬 개혁가이다. 비텐베르크 교회 제단화에는 부겐하겐이 열쇠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그의 노력 덕분인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전 세계에서 사회복지가 가장 발달한 루터교 국가가 되었다. 


참고도서 

1. 양태자, 중세의 뒷골목 풍경 , (서울 : 이랑, 2012)

2. 쿠어트 디트리히 슈미트, 살아있는 역사 교회사, 정병식 옮김, (서울 : 신앙과지성사, 2016)

3. 이성덕, 종교개혁 이야기, (경기 : 살림, 2006) 

4. 카터 린드버그, 유럽의 종교개혁, 조영천 옮김 (서울 : CLC,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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