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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an 16. 2017

루터의 스캔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2

수도사와 수녀가 결혼한다?

중세인 중에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신성모독이며, 이러한 결혼은 반드시 저주를 받아 머리 둘 달린 괴물이 나올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은 바로 루터와 카타리나(Catharina von Bora, 1499~1552)였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루터 부부처럼 많은 비평과 험담의 대상이 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루터의 결혼을 ‘악마의 도전’이라 불렀다.

카타리나의 이름에 폰(von)이 붙은 걸 보면 그녀는 귀족 출신이다. 그녀는 하급 귀족의 딸로 출생하자마자 어머니가 죽었다. 아버지는 2, 3년 후 재혼하였고 카타리나는 계모 밑에 자랐다. 그러나 불과 5살 때 그녀는 구레나에 있는 베네덱틴 여수도원으로 보내졌다. 9살 때 그녀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엄격한 수도원에 보내졌고 16살 때 수녀가 되었다.


수도원에는 40명의 수녀가 살았는데 늘 침묵을 지켜야 했다. 바깥에서 방문객이 오면, 원장 수녀 입회하에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도 창살로 된 창문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당시 관상 수도원은 대부분 이런 규칙을 지켰다. 카타리나는 수도원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았는데, 후일 라틴어로 보통 회화도 할 수 있어, 루터의 친구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1520년대 초 종교개혁자 루터의 소책자들을 수녀원에서도 읽었다. 수녀들은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구원은 종교적인 의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래.”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수도원을 떠나는 수녀와 수사들이 즐비하대.”

카타리나와 11명의 수녀는 수녀원을 탈출할 계획을 짰다. 수녀들은 루터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안 조치가 물샐 틈 없던 수녀원을 탈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수녀원은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죠지 공이 통치하는 곳에 있었다. 이미 죠지 공은 수녀 탈출 계획을 했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처형하였다. 루터는 토르가우의 한 지체 높은 시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60세 된 레온하르트 코페로서 가끔 수도원에 청어 통을 날라다 주던 상인이었다. 그는 12개의 청어 통을 가지고 수녀원에 갔다. 그리고 그 통 안에 수녀를 싣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3명의 수녀는 부모에게 돌아갔지만, 9명의 수녀는 루터를 찾아 비텐베르크에 갔다. 그녀들의 바람은 한 가지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한 학생이 자기 친구에게 편지하였다.

“처녀들이 한 수레나 이 읍에 왔어. 모두 목숨보다는 결혼이 더 간절하다는 거야. 하나님! 더 불행한 일이 떨어지기 전에 그들에게 남편감을 허락하소서.”


루터는 졸지에 중매쟁이가 되었다. 당시 독일 처녀들은 대개 15, 16세가 결혼 적령기였는데, 그 수녀들은 대부분 혼기를 넘긴 상태였다. 부지런히 노력한 끝에 8명의 처녀는 결혼하였지만, 카타리나는 2년이 넘도록 결혼하지 못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루터의 이웃인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의 가정에 임시로 취직하였다. 크라나흐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궁정화가였으며 시의원이며 시의 회계관이었고, 약사이자 포도주 상인이었다. 그는 많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으며 대부분의 시간에 그림을 그렸다. 크라나흐는 A. 뒤러, H. 홀바인과 어깨를 겨루는 거장으로 도나우 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다.

Lucas Cranach

카타리나는 크라나흐의 집에서 일하며, 곧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며 인간성까지 뛰어났다. 그녀는 누렘버그 저명한 집안의 젊은 청년을 만났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바움가르트너(Hieronymus Baumgärtner, 1498~1565)로서 카타리나보다 한 살 더 많았다. 그는 1518년에서 1521년까지 3년 동안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녔다. 개혁자 필립 멜랑톤의 집에 살면서 마틴 루터를 존경하고 따르던 학생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히에로니무스는 뚱뚱하여 놀림을 많이 받았다. 카타리나는 히에로니무스에게 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처럼 뚱뚱하다고 해도 그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남자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하였다. 카타리나가 비록 귀족 출신이라고 하지만, 부모에게 버림받고 수녀원에서 자라나 결혼 지참금을 가져올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 그녀의 희망, 그녀의 자부심은 하루아침에 다 파괴되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치욕, 분노, 카타리나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조롱하는 얼굴로 자신을 본다고 생각했다. 길에서, 시장에서, 교회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봐! 저기 버림받은 신부좀 봐!

신부?

카타리나와 히에로니무스는 약혼도 하지 않았어.

그는 카타리나를 우롱한 거야!”


루터는 그녀를 도우려고 히에로니무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네가 카타리나 폰 보라를 잡으려고 한다면,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빨리 서두르게나. 그녀는 자네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네. 나는 자네 두 사람이 연결되면 정말 좋겠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루터는 카타리나에게 글라츠 박사를 소개해 주었지만, 그녀는 죽어도 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연애를 실패했다고 해서 얼렁뚱땅 해치우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루터가 머무는 검은 수도원에 자주 찾아가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청소도 해주었다. 검은 수도원은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루터에게 살도록 허락한 곳이다. 커다란 수도원에 관리하는 손길이 없어서 버려진 방들이 수두룩했고 곰팡이로 가득했다. 루터, 브리스거(수도원 부원장), 지베르거(루터의 조교) 등 남자들은 짚을 넣은 자루 위에서 잠을 잤다. 수도원의 경제 사정도 아주 참담했다. 루터는 자신의 동냥 주머니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고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루터는 시 교회의 설교자로서 1514년경부터 9길더가 못 되는 연봉을 받았다. 어거스틴회 교수로 있으면서 곰팡이 내 나는 수도원을 숙소로 받았고, 봉급은 아니지만 물품으로 몇 가지를 청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가 쓸 수 있는 현금은 거의 없었다. 독일 전역에 종교개혁자로 널리 알려진 루터였지만 실상 그의 삶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카타리나는 곰팡이 핀 삭막한 수도원에 사는 루터가 불쌍했다. 그는 동냥으로 연명하는 가련한 수도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파문까지 당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나 부당한 일이었다. 카타리나는 검은 수도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돌봐주는 게 습관이 되었다.


1524년 루터를 믿고 따르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루터는 이제 막 시작한 종교개혁이 농민전쟁 때문에 무산될까 봐 걱정하였다. 그는 반란 지역을 찾아다니며 농민들을 설득하는 설교를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10만이 넘는 농민들이 학살당하였다. 루터는 몸과 마음이 지쳤다. 평소 신장이 약해서 늘 고생했던 루터는 피곤하여 쓰러졌다. 루터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카타리나뿐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배운 대로 커다란 냄비에 차를 끓여 루터에게 마시도록 자꾸 권하였다. 카타리나의 보살핌 덕분에 통증은 가라앉고 몸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1515년 5월 5일 루터의 종교개혁을 적극 지지하고 보호해주던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죽었다. 카타리나는 숨이 탁 막혀왔다.

“성모 마리아여, 이제 누가 루터를 보호해줄까요?”

카타리나는 마침내 결심하고 루터에게 청혼했다. 당시 여성이 먼저 청혼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카타리나는 관습과 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처녀였다. 수도원을 탈출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있지만, 그녀는 여성 해방을 스스로 실천하는 여인이었다.  루터는 나이 차이도 있고, 자신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문당한 수도사라는 사실에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카타리나가 싫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찾아가 의논하였다. 루터 아버지는 이미 흑사병으로 아들 둘을 잃은 뒤라 후손이 끊기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남은 아들인 루터가 가문을 이어주기를 원했다.


마침내 루터는 결혼을 결심하였다. 역사학자 레아(H. Lea)는 이런 말을 하였다.

“루터가 카타리나를 아내로 맞게 된 것은 그녀의 용모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유럽 사람이라기보다 아프리카인에 가까웠다.”

크라나흐가 그린 카타리나의 초상화는 기다란 얼굴에 툭 튀어나온 이마, 볼품없이 긴 코 그리고 고집이 세 보이는 완고한 턱의 여자다. 루터가 결혼을 발표했을 때 멜랑톤을 포함하여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반대하였다. 26살 수녀출신 카타리나와 42살 수도사 루터의 결혼은 어울리지 않았다.


수녀들이 탈출해서 루터를 찾아갔을 때부터 가톨릭은 온갖 악소문을 퍼트렸다.

“루터는 귀족 출신 카타리나와 함께 놀아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중략) 루터의 결혼식 벨이 울리자마자 그 음란한 수도사와 수녀는 수도원 담장에 수많은 사닥다리를 놓고서는 함께 군중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비텐베르크의 법률가 히에로니무스 슈르프(Hieronymus Schurff)도 멜랑톤과 같은 의견이었다.

“만일 수도사가 아내를 취한다면, 전 세상과 악마가 웃을 것이다. 루터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종교개혁은 결국 무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루터의 절친한 친구 슈팔라틴은 루터에게 약혼 기간을 오래 잡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했다. 루터는 이렇게 답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늦장 부리다 한니발은 로마를 잃었다. 늦장 부리다 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겼다.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들이 나를 찾겠으나 발견하지 못하리라’고 하셨지. 이처럼 성경, 경험, 모든 만물의 이치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선물은 그것이 날라 올 때 당장 받지 않으면 안 되.”

Johann Bugenhagen

1525년 6월 13일 결혼식.

루터는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보냈다. 주례는 비텐베르크 교회의 최고 성직자이자 루터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인 부겐하겐(Johann Bugenhagen, 1485~1558)이었다. 카타리나 탈출을 도와준 청어 납품업자 레온하르트 코페도 참여하였다. 루터의 부모와 가까운 친구들이 함께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선제후가 선물한 결혼반지를 나누어 끼었다. 두 겹의 금반지로 위쪽에는 사각형의 무늬에 굳은 믿음의 상징인 다이아몬드와 순수한 사랑의 징표인 루비가 박혀 있었다. 반지 안에는 각각 마틴 루터 박사(Martin Luther Doktor)라는 의미의 MLD와 카타리나 폰 보라(Catharina von Bora)를 뜻하는 CVB가 쓰여 있었다.


축복보다는 온갖 험담과 저주 속에 결혼한 이 부부는 어떻게 살았을까?

둘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다기보다 필요 때문에 한 결혼인데 과연 행복했을까?

루터의 결혼생활은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십시오.


참고도서 

1. 불순종의 아이들 / 아스타 샤이프 지음 / 이미선 옮김 / 솔솔출판사 / 2011년

2. 복음주의자의 아내들 / 윌리암 J. 피터슨 지음 / 이기봉 옮김 / 두란노 / 1989년

3. 중세의 뒷골목 풍경 / 양태자 지음 / 이랑 / 2012년

4.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 / 헤이코 오버만 지음 / 이양호, 황성국 공역 / 한국신학연구소 / 1995년

5. 마틴루터의 생애 / 롤란드 베인톤 지음 / 이종태 옮김 / 생명의 말씀사 / 1982년

6. 말틴 루터 / 지원용 지음 / 컨콜디아사 / 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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