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3
루터와 카타리나는 결혼 초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캐티(카타리나)는 말이 빨랐고, 루터는 성질이 급했다. 두 사람의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여느 옆집 부부 이야기와 비슷했다.
결혼 첫해엔 익숙해져야 할 것이 많았다. 루터는 신혼 초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전에 없었던 돼지 꼬리 두 가닥(캐티의 땋은 두 갈래 머리)이 내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곤 하였다.”
“결혼 전에는 일 년 내내 이부자리(짚단 뭉치)를 새로 깔아 본 일이 없었다. 땀에 전 밀짚이 썩어가고 있었다. 일에 지쳐 저녁엔 만사를 잊고 잠자리에 푹 파묻혔다.”
이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천하태평인 루터와 달린 캐티는 부지런하였다. 그녀는 잠자리를 깨끗이 하였고, 베개까지 장만했다. 검은 수도원은 형편 없었다. 부엌에는 화덕 하나만 덩그러니 있고 온통 그을음 투성이었다. 수도원에 40개 방은 하나같이 곰팡이로 가득하였다. 캐티의 손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움직였다.
루터의 가장 큰 약점은 금전 관계였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살았지만, 인심이 후하여 찾아오는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루터의 씀씀이가 어찌나 헤프던지, 화가요 은행가였던 크라나흐는 루터의 어음 지급을 거절할 정도였다. 루터는 “내가 노랭이 욕을 먹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그는 짜증이 날 정도로 태평스러웠다. 그의 후한 마음 덕분에 수도원은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사실 캐티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수녀원에서 당연히 그랬고, 크라나흐의 집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그러나 루터와 결혼한 이후 캐티는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아주 사소한 가정일조차도 체계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캐티는 모든 면을 다 관리해야 했다.
결혼 후 그들이 하였던 말다툼 중에 기록된 최초의 것은 결혼 선물 때문이었다. 마인즈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종교개혁 반대자)가 루터에게 20길더(당시 루터 두 달 치 월급)를 선물로 주었다. 루터는 원수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루터에게는 100길더의 부채가 있었기 때문에 캐티의 생각은 달랐다. 누구의 손을 거쳐 왔던 20길더의 선물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부부 싸움은 캐티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돈 문제로 자주 싸움이 벌어졌지만, 언제나 승리는 캐티의 몫이었다.
루터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문은 파다하였다. 출판업자인 로터(Michael Lotter, 1499c~1556), 루프트(Hans Lufft, 1495c~1584), 쉬를렌츠 등은 루터의 글을 출판하는 대가로 일 년에 400굴덴씩 주겠다고 했다. 이 돈은 수도원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액수였다. 하지만 루터는 돈 받기를 거절했다. 빈털터리 루터의 고집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수도원에는 우물도 없고, 목욕시설도 없고, 빵 굽는 오븐도 없었다.
캐티는 견디다 못해 큰 결심을 하였다. 일단 수도원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파기로 하였다. 공사비는 무려 백 굴덴이나 들었다. 두 사람은 또 돈 문제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월급이 올라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중 최고액을 받지만, 씀씀이가 큰 루터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캐티의 불만과 잔소리에 루터는 소리쳤다.
“악마 같은 여자를 마누라로 얻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캐티는 날이 갈수록 억척스러워졌다. 그녀는 수도원을 개조하여 욕실을 하나 설치했고, 자급자족을 목표로 상치, 배추, 콩, 완두, 참외, 오이를 심었다. 그녀가 돌보는 과수원에는 연못도 있어서 과일과 각종 물고기를 잡아 식탁에 올렸다. 동물가족도 상당수였는데, 돼지 8마리, 소 5마리, 송아지 9마리, 닭, 비둘기, 거위, 그리고 톨펜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도 있었다. 루터는 톨펜을 너무도 사랑하여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였다. 캐티는 수도원에서 먹고 자는 학생들에게 하숙비를 받았다. 캐티의 노력 덕분에 수도원은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캐티는 정원사, 요리사, 간호사, 소치는 사람, 장부계원, 양조자였다.
루터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겨준 유산을 가지고 캐티는 쥴스돌프의 농장을 하나 샀다. 농가 하나와 마구간 하나, 헛간 하나, 타작하는 광 세 개 뿐인 그곳은 농장이라 하기엔 너무 작았다. 그런데도 줄스돌프는 카타리나에게 도피성과 같은 곳이었다. 줄스돌프 농장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검은 수도원의 소란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부부싸움의 두 번째 요인은 캐티의 잔소리였다. 사실 루터는 잔소리가 필요한 사람이긴 하였다. 그는 너무나 자주 아팠다. 그는 번갈아 가며 통풍(관절염의 일종), 불면증, 감기, 치질, 변비, 신장결석, 현기증, 이명 증상 등 한마디로 종합병원 같았다. 캐티는 식이요법, 약초, 찜질, 마사지로 끈기있게 간호하여 루터의 건강을 지켜냈다. 나중에 의사가 된 그녀의 아들 파울은 그녀를 가리켜 반의사라고 하였다. 캐티는 루터의 건강과 식사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터는 식탁에서 대화를 즐겼다. 학생들은 필기도구를 가져와 루터의 이야기를 받아적었는데, 재담꾼인 루터의 말은 끝날 줄 몰랐다. 캐티는 정원 곳곳에서 수확한 야채와 훈제 돼지고기를 정성껏 요리하여 내놓으면, 수다와 논쟁 때문에 번번이 음식은 식었다. 음식상을 차린 캐티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여러분은 먹지는 않고 끝없이 말만 하는 거죠?
여러분을 위해 부엌에서 아침을 보낼 마음이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어요.”
루터는 한숨을 푹 쉬며 말하였다.
“내가 다시 결혼한다면, 저 사람을 돌로 다듬어서 순종하는 아내로 만들어 놓겠다.”
잔소리가 심하긴 했지만, 그녀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지성과 인간성 때문이었다.
루터 부부가 늘 싸움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맞추어 가면서 둘도 없는 사이가 되어갔다.
“가사에 관한 한 나는 캐티를 따른다. 그러나 그 이외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나에게 프랑스 또는 베니스를 준다 해도 캐티와는 바꾸지 않겠다.”
“나는 그리스도보다 캐티를 더 신용하고 있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하신 일이 더 많은데 말이야."
루터는 자기 아내를 “내 갈비”라고 웃으면서 얘기하는가 하면 곧잘 “내 주인”(my lord)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캐티(Katie)의 이름을 바꿔 케테(Kette, 쇠사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루터는 자기가 가장 아끼던 책인 ‘갈라디아서 주석’(1535)을 ‘나의 사랑하는 케테’라고 불렀다. 캐티는 공적인 대화에서는 루터를 언제나 “박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루터를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캐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루터가 공부할 때 그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캐티에게 루터는 50굴덴을 줄 테니 성경을 읽으라고 하자 캐티는 좋아하며 성경을 읽었다. 캐티는 성경에 대해서도 해박하여 가끔 탁상담화에 끼어 토론하기도 하였다. 루터는 캐티에게 “당신은 로마 교황청의 그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알고 있군”하며 칭찬하였다. 캐티는 온종일 아이들과 동물들과 하인들과 집안일을 한 후에, 남편과 함께 이야기하기를 좋아 했다. 루터 역시 하루 네 번 설교하고, 강의하고, 식사하며 토론하고, 시간 나면 의자에 앉아 책을 보았다. 저녁 시간 피곤한 루터는 쉬고 싶은데, 캐티는 궁금한 것을 알고 싶어 끊임없이 질문하였다. 시편 해석에 대하여, 예정론에 대하여, 정치에 대하여 캐티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루터는 그런 캐티가 사랑스럽기도 하였지만, 때로 부담스럽기도 하였다.
“나는 교황에 대해서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단에 대해서도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심지어 캐티에 대해서도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는 가정을 성품 학교라고 불렀다.
둘은 아들 셋, 딸 셋 6명의 자녀를 낳았다. 1526년 6월 7일 첫아들 요한(Johannes)이 태어났을 때 루터는 너무 기뻐하였다. 사람들은 머리 둘 달린 괴물이 나올 거라고 수군거렸는데 정상아를 낳은 루터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친구 슈팔라틴에게 편지를 썼다.
“어린 요한은 밝고 튼튼합니다. 그 녀석은 아주 잘 먹고 잘 마십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먹고 마시는 인간”(homo vorax ac bibax!)을 주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로마 가톨릭의 악평에 늘 시달렸는데 만일 루터의 첫 아이가 장애아였다면 종교개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이후로 2남 3녀 다섯 아이가 더 태어났다. 엘리사벳(Elisabeth, 1527. 12.10), 막달레나(Magdalena, 1529, 12. 17), 마틴(Martin, 1531. 11. 9), 파울(Paul, 1533. 1.28), 마가렛(Margaret, 1534. 12. 17). 두 딸은 어렸을 때 죽었다. 엘리사벳은 8개월 만에 죽었고, 막달레나는 13살에 죽었다. 루터는 아들들이 군인과 학자와 농부가 되길 원했다. 그의 뜻과 달리 요한은 법률가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바이마르(Weimar) 왕실 추밀원 참의원이 되었다. 마틴은 신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성직을 가지지 않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았다. 막내 파울은 의사가 되었는데 나중에 브란덴브루크 선제후 주치의가 되었다. 유일하게 생존한 딸 마가렛은 폰 쿤하임(von Kurheim)이라는 브란덴부르크의 귀족과 결혼하였다.
루터는 말하길 “자녀는 햇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들창문과 같다.”고 하였다. 루터는 자녀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아이들은 루터의 서재에서 자주 놀았다.
“내가 앉아서 글을 쓰고 있노라면, 한스(큰아들)는 나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준다. 그러나 소리를 너무 크게 하면 좀 꾸중을 해 준다. 그래도 그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루터는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놀기도 하고 직접 악기를 다루며 찬양을 불렀다. 그는 토가우 출신의 가수이자 성가대 지휘자인 요한 발터(Johann Walter, 1496~1570)를 데려와 검은 수도원에 합창단을 만들었다. 루터는 류트를 연주하며 작곡도 하였다. 언젠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가 모든 멋진 곡조를 다 가질 필요는 없어.”
루터는 자녀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 잘못하면 엄하게 야단을 쳤다. 루터는 언제나 사랑의 사과(apple)와 채찍으로 자녀를 교육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루터는 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탁상담화에 어린 자녀들까지 다 참석하게 했던 것은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95개 조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배워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1520년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여자아이들도 매일 한 시간씩 독일어나 라틴어로 복음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524년 2월 “독일 모든 도시의 시의원들에게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고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루터의 권고에 따라 1524년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노르트하우젠(Nordhausen), 할버슈타트(Halberstadt), 고타(Gotha)에 라틴어 학교가 신설되었다. 1525년 루터의 고향 아이스레벤(Eisleben)에, 1526년에는 멜랑톤의 주도 아래 뉘른베르크(Nürnberg)에 학교가 세워졌다. 1530년 루터는 다시 한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에 대해 설교하였다.
“성경과 배움이 사라진다면, 독일 땅에는 난폭하고 거친 군중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루터의 영향으로 독일 전역에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527년 그림마(Grimma)에, 1533년 비텐베르크에 여학교가 건립되었고, 1535년에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에 6개의 여학교가 운영되었다. 1537년에는 새로운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gymnasium)이 슈트라스부르크에 세워졌다.
루터는 나중에 죽을 때 그의 유산 모두를 오직 한 사람 케테에게만 상속하였다. 이는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녀만이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루터의 자필 유언장이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지리한 법정 싸움을 해야 했다. 재판에 이긴 캐티는 농장에서 계속해서 살 수 있었지만 1552년 비텐베르크에 페스트가 만연하자 살던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태운 마차를 몰고 달리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쳤고 폐렴이 겹쳐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루터가 죽은 지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다.
비록 두 사람이 열렬히 사랑하여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은 서로에게 맞추어가면서 모범적인 가정을 꾸며 나갔다.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었고, 염려가 많은 결혼이었지만, 놀랍게도 루터 가정은 독일 기독교의 가정생활, 자녀 교육의 모델이 되었다.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내가 아내를 잃는다면 비록 여왕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지 않으리라.”
1. 불순종의 아이들 / 아스타 샤이프 지음 / 이미선 옮김 / 솔솔출판사 / 2011년
2. 복음주의자의 아내들 / 윌리암 J. 피터슨 지음 / 이기봉 옮김 / 두란노 / 1989년
3. 중세의 뒷골목 풍경 / 양태자 지음 / 이랑 / 2012년
4.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 / 헤이코 오버만 지음 / 이양호, 황성국 공역 / 한국신학연구소 / 1995년
5. 마틴루터의 생애 / 롤란드 베인톤 지음 / 이종태 옮김 / 생명의 말씀사 / 1982년
6. 말틴 루터 / 지원용 지음 / 컨콜디아사 / 1972년
7.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 김용주 지음 / 익투스 / 2012년
8. 종교개혁기 루터파의 아동교육과 근대국가의 형성 / 박준철 지음 / 한성대 / 2008년
1.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2. 사회개혁과 종교개혁
3.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
4. 루터의 양심 고백
6. 미완의 혁명
7. 혁명인가? 보수인가?
9. 저항의 역사
11. 루터는 신비주의자였다.
12. 루터의 스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