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11
유럽은 1300년 직후부터 잇달아 재앙을 겪었다. 소빙하기라고 불릴 만큼 날씨는 비정상적으로 춥고 습하였다. 1315년부터 3년 동안 대기근이 유럽을 휩쓸었다.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갔다. 기근은 더 큰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굶주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곡물을 아시아에서 수입하였는데,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가 함께 왔다. 1348년부터 시작한 흑사병은 이후 300년 동안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게다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유럽을 파멸로 몰아넣은 백년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역사학자 바바라 터크만(Barbara W. Tuchman)은 이 시대를 “비참한 14세기”라고 하였다. 게다가 부패한 교황과 황제는 권력을 가지고 아귀다툼하였다.
중세 유럽인은 자신이 사는 시대가 종말이라고 믿었다. 기근과 전쟁, 흑사병과 홍수,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은 모두 종말의 징표라고 생각했다. 중세 수도원 신비주의는 추악한 세상을 떠나 은둔하며 수도생활하기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싫었다. 세상을 증오했고, 부패한 종교인에 대해선 진저리를 쳤다. 로마를 중심으로 부와 권세를 잡으려고 싸우는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로마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에 신비주의가 널리 퍼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흔히 신비주의 하면 황홀(ecstasy), 환상(illusion), 환청(hallucinations) 등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지만, 독일 신비주의는 경건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지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와 퀠른(Köln)이다. 이 운동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독일에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ense, 1295~1366), 요한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였고, 네덜란드에서는 요한 루이스부룩크(Jan van Ruysbreck, 1293~1381),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d Groote, 1340~1384) 그리고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0) 등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친구들”(Gottesfreunde, amici Dei)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주장과 가르침은 이러하다.
자기 부인의 길을 통해 욕구와 의지를 죽이므로 천국과 구원이 임한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인간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한다.
신비는 하나님과 인간의 최종적인 연합, 인간의 신격화를 목표한다.
지옥을 강조하는 중세의 공포신앙을 배격하고, 선행에 의한 공로 신앙이나,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 신앙을 거부한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별을 두지 않고 만인 제사장 설을 주장한다.
하나님 앞에서 남녀 성적 차별은 없다.
독일 신비주의는 루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행동하고 실천하는 신비주의자 요한 타울러는 루터에게 스승과도 같았다. 그는 친구 게오르그 스팔라틴(Georg Spalatin, 1484~1545)에게 보낸 편지에 타울러의 강론은 순수하고도 견고한 신학이라고 하였다. 1518년 자신의 95개 명제를 변호하면서, 루터는 모든 스콜라 신학자들 보다 타울러 한 사람에게서 더 훌륭한 신학을 발견했다고 토로했다.
루터는 14살 때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는데, 그 학교는 독일 신비주의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공동생활 형제단’이 운영하는 학교였다. 여기서 그는 중세 신비주의자를 다 접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새벽 4시부터 6시까지는 명상과 기도를 하며 성경을 연구하였다. 주일과 공휴일에는 외부인에게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읽어주도록 하였다. 루터는 이 학교에서 인문주의에서 강조하는 성경연구 방법과 신비주의에서 강조하는 경건의 훈련을 교육받았다. 신비주의는 일찍부터 루터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1505년 21살 때 루터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7월 2일 만스펠트(Mansfeld)에서 가족과 함께 며칠을 보낸 후 에르푸르트(Erfrut)로 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우 속에 길을 걷던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8km 떨어진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근처에서 벼락을 경험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루터는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성 안나에게 부르짖었다.
“성 안나여. 저를 구해주소서. 제가 수도자가 되겠나이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엄격한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인 검은 수도원(black monastery)에 입회하였다. 1539년 그는 탁상담화 중 자신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하였다. 위기의 순간에 얼떨결에 이루어진 서원은 자유의사로 결정한 것이라 할 수없다.
수도원 생활은 즐겁지 않았다. 수도원이 전한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무지개를 타고 두 칼을 입에 물고 계시는 모습이었다. 수도원 생활을 할 때 루터는 제단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죄인을 심판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루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요한 타울러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수도생활을 하였다. 고통은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멸절이나 자기 포기를 통한 참된 복종을 할 때 얻을 수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하려고 늘 고행하고 수도생활 하도록 가르쳤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사 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공포와 전율 속에 긴장하였는데, 복수와 심판의 그리스도께서 떡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07년 4월 4일 사제로 서품을 받고 5월 2일 첫 미사를 집전할 때를 루터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내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제단에 서서 성만찬을 집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너무나 공포에 사로잡혀 상급자의 훈계가 없었다면, 도망쳤을 것입니다. 내가 ‘그러므로 여러분 가장 자비로우신 아버지’ 이렇게 말씀을 읽을 때, 나는 유다처럼 세상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중보자 그리스도 없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전할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수도사로서 나는 그와 같은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온갖 고행을 다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보려는 루터의 시도는 늘 실패로 끝났다. 그때 루터를 지도해 준 사람은 수도원장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utz, 1468~1524)였다. 슈타우피츠는 독일 경건 운동의 대표자요 신비주의자였다. 슈타우피츠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루터에게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 성부께서는 너무나 고귀하시다.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속에서 이해되고 발견될 수 있다.”
슈타우피츠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며 루터에게 성경을 좀 더 깊이 연구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는 1516년 뉘른베르크에서 강림절에 설교하였다.
“고통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자비하신 하나님을 보증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건한 신비주의자였던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개혁의 길로 이끈 선생이었다.
마침내 루터는 소위 탑 체험(Turmerlebnis)을 통하여 진정한 회심을 한다. 수도원에 입회한 후 금욕적 삶을 살며, 자신의 몸에 채찍질까지 하며 회개하였지만, 그는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합일의 경지까지 갈 수 없었다. 1515년 바울 강의를 준비하던 중 수도원 탑 안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흠잡을 데 없는 수도자로 살았지만, 극도로 혼란스런 양심을 지닌 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 느꼈다. 나의 고행이 그분의 진노를 달랠 수 있을지 도대체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죄인을 벌하는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으며, 아니 오히려 증오했으며, 하나님을 모독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내심 하나님께 화를 내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하심 덕분에 밤낮으로 묵상하던 중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선물, 곧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성경 전체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보였다.”
루터는 마침내 신비주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믿음은 루터 영성의 핵심 단어가 되었다. 고행이나 금욕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참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 된다. 루터가 처음에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구원의 길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신비주의 길을 벌리고 신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신비주의에서는 죄란 이기심, 자기애(narcissism)라고 보았다면 루터는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보았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접촉을 추구하였다면, 루터는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신비주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개인적인 노력과 수도생활을 했다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를 구원의 대명제로 여겼다. 루터는 마침내 신비주의 신학에서 벗어나 말씀의 신학으로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스승이었던 슈타우피츠와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1521년 봄이었다. 슈타우피츠는 가톨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교황의 파문을 받은 루터는 황제와 제국으로부터 어떤 핍박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을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스승 슈타우피츠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가 감히 당신에게 솔직히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심히 반복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황 사이에 당신이 휘말려 들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입의 성령으로 곧 이 악의 자식을 멸하도록 기도합시다. 만일 당신께서 저를 좇아 이(개혁의) 길을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제가 이 길을 가며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복종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참으로 당신의 복종(교황에게 복종)으로 인하여 저는 대단히 슬펐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용감하게 은총과 십자가를 설교하던 당신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신비주의자 슈타우피츠와 종교개혁가 루터는 그렇게 갈라섰다. 1522년 4월 교황의 허가를 받아 슈타우피츠는 어거스틴 수도회를 떠났으며, 그해 8월 2일 잘츠부르크의 성 베드로 베네딕트회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루터는 버림받았음을 느꼈다. 심지어 배신감마저 느끼며 그의 실망을 공공연하게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타우피츠는 종교개혁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고 이끌었던 사람으로 기억하면서 루터는 언제나 그를 존경하는 아버지로 여겼다.
1. 기독교의 역사 / 알리스터 맥그라스 지음 / 박규태 옮김 / 포이에마 / 2016년
2. 교회사 전집 6권 / 필립 샤프 지음 / 이길상 옮김 / 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6년
3. 개혁의 시대 / 스티븐 오즈만 지음 / 손두환, 강정진 공역 / 칼빈서적 / 1998년
4. “루터와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적 접점” Paul Rolphy Pinto 씀 / 이국환 옮김 / 종교개혁 500년, 그 빛과 어둠 /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 2016년
5. “마르틴 루터의 영성 신학, 그의 Anfechtung에 관한 연구” 김주한 씀 / 대학과 선교 제15집 / 한국 기독교 대학 교목회 / 2008년
6. “독일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김기련 씀 / 신학과 현장 제5집 / 한국실천신학회 / 1995년
7.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인간 루터 / 헤이코 오버만 지음 / 이양호, 황성국 공역 / 한국신학연구소 / 1995년
8. “루터와 종교개혁의 발단” Marc Lienhard 씀 / 신학사상 99집 / 한국신학연구소 /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