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시리즈 32
중세 경제 구조는 영주와 영주의 영토에 속한 농노로 이루어진 장원경제다. 중세 인구 80~90%는 농촌에 살았으며 농민들은 수확의 3분의 2를 지배계급인 영주와 교회에 바쳐야 했다. 중세 농민은 죽으라고 일해 보았자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 그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영주의 땅에 종속되어 살았다.
상황이 그러한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면서 서유럽 인구의 1/3~1/2이 죽었다. 갑작스러운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농민에게 부과된 세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세수 감소를 우려한 영주들은 세금을 대폭 올렸다. 흑사병의 위협에서 겨우 살아남은 농민에게 지배계급의 과도한 세금은 심각한 위협이었다.
중세 음유시인이었던 트루바두르(Troubadour)는 당시 상황을 노래하였다.
“나는 보았네.
교황이 자신의 신성한 책무를 배신하는 것을
부자는 항상 그의 은총을 입고 있는데
가난한 자에 대한 호의는 영원히 보류되었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모으려고 애를 쓰며,
황금의 옷을 입고 영면하기 위해
백성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네.”
중세 영국의 문학 작품 중 ‘부둣가의 농부’라는 노래가 있다.
“네 승단의 탁발승들을 모두 보니
설교한다는 것이 자기네 배를 불리기 위함이요.
성경 해석은 제멋대로라.
수도원 원장 쯤 되면 호사스러운 옷으로 몸을 감으니
금전과 상품이 나날이 불어나니 그럴 수 밖에 ...
흑사병 이래 교구는 가난해졌으니
교구 성직자들은 주교님께 진정하여
교구를 떠나 부유한 런던에 가서 살고자
거기서 성직 매매나 실컷 하고자
허락을 받으려니 과연 돈이 좋기는 한가 보다.
주교, 신부, 수도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삭발하고 가운을 입은 자들이
교구에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주는 봉사 대신에
런던에 가서 자리 잡고 왕궁에서 돈 계산에 열중하는가 하면
재판소나 대법원에서 교구민과 가난한 자들에게서
빚 받아 내기에 여념이 없다.”
마른 수건도 짜면 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가난한 농민들의 마지막 동전 한 푼이라도 뜯어내려고 가톨릭은 면벌부 판매를 시작하였다.
34살의 젊은 수도자 마틴 루터는 당시의 상황을 보면서 분노하였다. 그는 종교를 빙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호가호위하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면벌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의 각계 각 층에 지지를 받았다.
독일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에 반발심을 가진 영주들에게 루터의 개혁은 기쁜 소식이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세력을 막아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는 독일 연방 국가의 힘을 키우려고 하였다.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는 중요한 존재였다. 프리드리히는 교황과 황제가 이단자로 파문하고 추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보호하였다.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비호 아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루터의 개혁 사상 중 직업 소명론은 상인들에게 복음이었다. 성실하게 농사짓고 살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상업뿐이었다. 무역과 상거래를 통해 돈을 번 상인들은 평범한 농민들에게 이상적 모델이었다. 그러나 가톨릭과 지배계급은 새롭게 등장하는 상인계급(bourgeois)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상업은 천한 일이고, 돈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도적질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루터가 ‘직업 소명론’을 이야기하였고 상인들은 루터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다. 직업은 자기 생계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곧 성직이다.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장이다.”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을 목적으로 할 때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루터의 사상은 중세 가톨릭 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루터의 개혁은 농민들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인 만인 제사장 설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억압상태에서 허덕이던 농민들에게 루터는 구세주와 같았다. 루터는 말하였다. “농민이야말로 성서적 인간이요, 직업 중에서 농업이 제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직업이다.”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중세 말 농민들은 지속하여 지배계급에 저항하였다. 1517년 종교개혁이 있기 약 30년 전부터 독일은 최소한 10여 차례의 농민 봉기를 경험하였다.
1439년 웜스 시에서 농민 봉기
1468년 알사스에서 봉기
1476년 니클라스하우젠의 한스 베헴의 봉기
1493년 분튜슈의 봉기
1514년 콘라트 농민 반란
1517년 부느슈의 반란
1524년 튜빙겐의 농민 대 봉기
농민들은 12개 요구 조항을 작성하였다.
1) 전체 교구민은 목사를 선출할 권리가 있다.
2) 공물의 십일조는 목사의 봉급을 지급하고 남은 것은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3)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하므로 농노는 해방하여야 한다.
4) 사냥과 수렵의 자유를 허용하라.
5) 숲에서 가정용 땔감을 얻을 권리를 보장하라.
6) 강제 부역을 제한하라.
7) 계약에 명시되지 않은 부역에는 급료를 지급하라
8) 공정한 토지 관리인을 선정하고 공정한 토지세를 정하라.
9)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처벌을 중단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라
10) 권력으로 무단 점유해온 목초지와 밭을 환원하라
11) 과부들과 고아들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상속세를 폐지하라
12) 이 모든 요구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검증하되, 만약 성경에 부합하지 않으면 철회할 용의가 있다.
농민들은 루터가 확실한 지지자가 되어줄 것이라 기대하였다.
1524년 농민들이 봉기하였을 때 루터는 처음에 평화를 호소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겪고 있던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평화를 위한 제언’이라는 편지에서 농민과 영주 양쪽을 모두 비판하였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을 살펴보면 농민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신학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던 루터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기를 농민들에게 요구하였다. 농민들은 루터의 입장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들은 루터가 자기들의 지지자가 아님을 직감하고 봉기를 강행하였다.
평화를 위한 제언이 농민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루터는 태도를 돌변하였다. ‘살인하고 강도질하는 농민 무리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선언하였다. 추악한 돼지 같은 농민들을 칼로 진압할 것을 영주들에게 재촉하였다. 농민을 동정하는 사람은 진짜 반역자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참고 무저항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하층 계급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리 악할지라도 정부가 존재하기를 바라신다.” 루터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제후와 귀족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가 있는 세상 나라보다 종교적이고 신성한 하늘나라에만 관심을 가졌다. 세상을 요란케 하고(행16:20)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데는 뜻을 두지 않았다.
처음에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았던 루터가 결국 영주 편에서 농민과 상인을 외면한 것은 현실과 타협한 결과였다. 영주는 교황과 황제의 위협에서 루터를 지켜주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확실한 후원자였으며, 루터에게 커다란 성과 직업을 주었다. 루터는 개혁을 견고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영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신학은 훌륭하였지만, 그의 행동과 삶은 그러하지 못했다. 루터는 말과 행동, 이론과 실천에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의 경제사상은 결국 칼빈에 이르러서야 꽃을 피우게 되었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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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봉원영,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사회참여적 특징과 현대 기독교적 적용”,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7(5), 한국콘텐츠학회 (2017)
4. 홍지훈, “루터와 독일 농민전쟁”, 장로회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5)
5. 김성욱, “루터와 농민전쟁”, 종교개혁 기념강좌 497, (2014)
6. 장문강, “마르틴 루터의 농민전쟁에 대한 행동의 일관성”, ⌜민주주의와 인권⌟ 12(3),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2012)
7. 김선영, “신성로마제국 선제후령 작센의 프리드리히 현공에게 마르틴 루터의 의미”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8, 한국기독교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