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념 기념 시리즈 6
가끔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인생을 멋지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각의 시계를 과거로 한참 돌려 조선 시대나 중세 시대에 태어난다면 어찌 될까? 그때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환경에서 살았을까?
중세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인간존재의 비참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다. 1200년경에 로타리오 디 세니가 쓴 책인데 종교개혁 전까지 무려 300년 동안 널리 읽혔던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희망 없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누가 내게 눈물의 샘을 주어, 인간존재의 한탄할 만한 조건들 속으로 들어선 것에 울고, 죄 많은 인생을 계속한 것에 울고, 저주스러운 삶의 종말에 울도록 하는 것인가?” 1) 중세의 삶이 어떠하였길래 이런 절망적인 책이 인기를 끌었을까?
중세 인구비율은 대체로 80~85%가 농민이었고, 10~15%는 도시민 그리고 5%의 귀족과 성직자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인구가 5만을 넘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도시민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대부분 사람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중세 유럽 농촌에서 가장 열악한 것은 농기구의 후진성이다. 쟁기는 대부분 나무를 불에 태워 단단하게 만든 것을 사용하였고, 보습 날에 금속을 부착한 것은 10세기경이 되어서야 겨우 가능했다. 농경지는 척박하여 수확량이 미흡하였다. 유럽에서는 삼포제(三圃制)를 실시하였는데, 마을의 전체 경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한 곳은 보리, 귀리 등 여름 곡물을 심고, 다른 한 곳은 가을 곡물인 밀과 호밀을 심었으며, 나머지 한 곳은 휴작하면서 가축을 방목하였다.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돌아가면서 땅을 쉬게 하는 농법이었다.
중세 농민을 괴롭힌 것은 수확량이 적은 것뿐만 아니라, 영주들이 거두어들이는 세금이었다. 영주는 농민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땅의 3분의 1 또는 2분의 1에 달하는 생산량을 가져갔다. 2) 뿐만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는 사람이 언제든 자기 멋대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임시세가 있었고, 농민이 사망하였을 때 부과하는 상속세가 있었다. 교회 역시 미망인이나 상속자에게 장례비용으로 가축과 땅을 요구했다. 이 결과 농민들은 영주와 교회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농노로 전락하였다.
당시 농민은 주로 보리나 귀리로 만든 검고 딱딱한 빵을 완두콩이나 채소를 섞어 만든 수프와 함께 먹었다. 밀을 재배하였지만,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주에게 세금으로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세 농민은 평생 밀로 만든 부드러운 하얀 빵을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중세 농민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굶주림이었다. 사람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힘들었다. 사람들은 도시에서도 대개 외풍이 심한 나무로 지은 오두막에 살았다. 왕궁, 수도원, 교회, 도시의 요새 등 오늘날 공공건물이라 부를 만한 집들만 돌로 건축하였다. 특히 겨울이면, 사람들은 연기에 그을린 화덕 주변에 웅크리고 모여 앉았다. 빛은 출입문이나 천장의 연기 구멍을 통해서만 들어왔다. 12세기 이후에야 유리가 처음 사용하였기에 그 전에는 집에 창문이 없었다.
10세기에서 12세기 중세 유럽 사람의 평균수명은 30세 남짓이었다. 알프스 북쪽에 있는 100군데 공동묘지에서 나온 데이터를 살펴보면, 가장 많은 사망자 연령은 14세에서 20세 사이고, 그다음이 20세에서 40세 사이다. 3) 그들 대부분은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죽었다. 역사가들은 먹는 입의 수를 조절하기 위하여 합법적인 어린이 살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조금이라도 연줄이 있는 사람은 아이를 살리기 위하여 수도원에 보냈다. 보통 7살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15살까지 수련 기간을 지낸다. 부모는 ‘이제 그놈은 평생 제 먹을 게 있다.’고 말하면서 안심하였다. 1140년에 태어나 8살에 수도원에 넘겨진 링컨(Hugo von Lincoln)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 세상의 즐거움을 나는 맛보지 못했다. 어떻게 노는지 알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했다.” 4) 중세 후기에는 나이 든 사람도 수도원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1346년 유럽에 상륙한 흑사병이었다. 약 300년 동안 지속해서 발병한 흑사병은 전 유럽의 공포였다.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유럽 인구의 최소한 3분의 1, 아마도 절반가량이 첫 흑사병 유행 기간(1347-1350)에 사망했다. 그 후로도 계속 죽었다. 1450년까지 흑사병, 기근, 전쟁 등의 복합적 원인으로 유럽 전체 인구의 50%가 사망했다. 독일만 놓고 보면, 1348년 이전까지 존속했던 촌락 가운데 4만 개 이상이 1500년경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5)
흑사병은 유럽 사회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상상해보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의 절반이 죽어가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흑사병이 전염병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 전염되는지 몰랐던 중세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은 공포에 빠졌다. 그들은 희생양을 찾았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어 흑사병을 번지게 하였다는 헛소문에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흑사병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반응은 ‘채찍질 고행(Flagellant movemnet)’였다. 죄 많은 세상에 흑사병을 내려보낸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려는 염원으로 몸에 피가 나도록 스스로 채찍질하였다. 루터도 수도원에서 채찍질 고행을 자주 행하였다. 온갖 미신적 행위들이 난무했는데, 유물을 부적처럼 여기는 유물 숭배가 성행하였다. 성인이 살아생전 기대었다는 나무, 성인이 잤던 침대, 성인이 식사했던 식탁도 성물로 둔갑했다. 심지어 그들이 입었던 옷의 실오라기 하나만 손에 넣어도 성인의 유물을 지녔다는 기쁨에 도취하였다. 성물이 있으니 성지가 생기고 성지가 생기니 사람들이 몰렸다. 성인의 유골은 최고의 부적이었다. 베로나의 페트루스 성인은 손가락뼈가 35조각으로 잘려서 팔려나갔다. 6) 가톨릭에는 아직도 유물 숭배의 잔재가 남아있다.
흑사병의 충격은 사람들의 생사관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흑사병이 한 도시나 마을에서 맹위를 떨치는 기간은 평균 6개월이었다. 6개월 만에 인구의 절반이 원인도 알지 못 한 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유럽인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신과의 영적 합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신비주의가 등장하였다. 7) 중세 신비주의와 종말론은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여겼다. 중세인들은 로마 제국이 세계 역사에서 마지막 제국이라고 확신했다. 존경받던 교부 제롬(Jerome, 347~420)은 다니엘 7장을 해석하면서 로마 제국은 최후 심판 이전까지 존재할 마지막 제국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세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로마 제국으로 이름만이라도 유지하려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세웠다. 다 쓰러져가는 왕실, 부패한 교회, 가혹한 세금으로 농민을 괴롭히는 영주들,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중세인은 드디어 종말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것만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까지 예언되었던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교황청에 나타났으며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 루터는 종교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모든 형식과 의식들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의인은 중세 교회가 행하는 예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수도사나 사제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제라는 만인제사장설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미 백여 년 전부터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던 농민들은 루터야말로 자신들의 지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루터의 글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이 루터를 찾아 비텐베르그로 왔다. 그중에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c1490~1525)가 있었다. 뮌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매료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삶을 시험과 고난의 삶으로 규정하는 십자가 신학은 뮌처의 정서를 자극했고, 자신도 그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자 하였다. 루터 역시 뮌처를 아껴 목회 자리까지 소개해주었다. 8) 그러나 뮌처는 루터가 성경에 너무 집착한다는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요하킴 플로레에 영향을 받은 뮌처는 성경의 문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직접적 계시라고 생각했다. 성령은 성경이나 교회를 통하지 않고 개개인에게 직접 임한다는 것이다. 뮌처는 로마 가톨릭과 마틴 루터를 함께 싸잡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영혼의 심연’에서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을 막는 것이 가톨릭 성직자들이 아니겠는가? 가난한 사람들을 광신자라 부르고 사람들이 영이라고 말하거나 읽는 것을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루터 아니었던가?” 9) 그는 루터의 신앙은 허구적이며 이념적이라고 하였다. 루터가 말하는 칭의론은 고난 속으로 들어가는 예수의 길을 걷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강조하는 달콤한 독이라고 평가하였다. 로마 가톨릭이나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일종의 ‘꿀과 같이 달콤한’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쓰디쓴’ 고난을 겪으시는 그리스도에는 관심이 없다.
뮌처는 기꺼이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 자신을 던져 넣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하면서, 고난의 그리스도를 따라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자고 외쳤다. 그것은 곧 전통과 교회와 귀족에 대한 저항이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에게 반대했던 것처럼, 그 역시 새로운 엘리야가 되어 옛 신앙을 가진 사제들과 종교개혁의 서기관들(루터 일파)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사람들을 미혹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회개의 설교자였던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에 준비되었던 것처럼, 그 역시도 새로운 요한이 되어 모든 기독교 세계를 향해 회개와 회심을 요구하였다. 뮌처는 세상이 크게 바뀌어 모든 관계가 개혁되기를 기대하였다. 택함 받은 경건한 사람과 저주받은 죄인을 구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자신의 나라와 통치를 세우시되,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10)
뮌처는 농민들이 부유한 수도원과 가톨릭 귀족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농민들을 경건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농민이 일으킨 싸움은 종말의 때에 발생하는 마지막 전쟁으로서 불경하고 저주받은 악인(가톨릭과 귀족들)과 충돌로 생각했다. 뮌처는 농민 반란을 묵시적으로 해석하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기드온의 300명 용사를 생각하며 300명의 사람을 끌고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을 향해 갔다.
뮌처는 프랑켄 하우젠 전투 직전에 농민들에게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싸우라! 바로 그 때 무지개 색깔의 태양 빛이 비추었는데, 그는 그것을 노아의 영원한 언약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무참히 패배하였다. 십만에서 십오만에 이르는 반란군이 들판이나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농민들이 학살당한 것 때문에 뮌처가 자신의 신학을 의심하거나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기대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사람들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뮌처도 체포되어 1525년 5월 27일 뮐하우젠에서 참수당하였다. 처형당하기 직전 그는 제후들에게 구약성경의 열왕기서를 읽으라고 요청하면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며 섬겨야 하는 그들의 책임을 마지막까지 강조하였다. 11)
뮌처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다양하다. 루터에 의해서 이단이라 낙인찍혔으며,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재세례파와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외면당하였다. 엥겔스는 뮌처를 평가하기를 프롤레타리아의 목표를 아직 실현할 수 없는 성숙하지 못한 혁명이었다고 하였다. 12) 그러나 뮌처의 생각을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모형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13)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놓고 현재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루터나 뮌처는 모두 그 시대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뮌처는 종말론적 신비주의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농민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였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마틴 루터 없는 토마스 뮌처 없고, 또한 토마스 뮌처 없는 마틴 루터는 없다. 종교개혁 없는 혁명은 있을 수 없고, 혁명 없는 종교개혁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14)
1. 중세로의 초대 /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 70쪽
2.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상 / 주디스 코핀, 로버트 스테이시 공저 / 박상익 옮김 / 소나무 / 2014년 / 419쪽
3. 중세로의 초대 / 49쪽
4. 상동 / 74쪽
5.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상 / 531쪽
6. 중세의 뒷골목 풍경 / 양태자 지음 / 이랑 / 2012년 / 90쪽 이하
7. 세계사 산책 / 역사 교육자 협의회 / 이윤희 옮김 / 백산서당 / 1993년 / 208쪽
8.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 김용주 지음 / 익투스 / 2012년 / 228쪽
9. 신비와 저항 / 도르테 죌레 지음 / 정미현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 2007년 / 141쪽
10. 종교개혁과 신학자들 / 카터 린드버그 지음 / 조영천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 / 2012년 / 605쪽
11. 상동 / 617쪽
12. 마르크스, 뮌처, 혹은 악마의 궁둥이 / 박설호 편역 / 울력 / 2012년 / 151쪽
13. 마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 신학적 배경과 한계 / 나학진 지음 / 신학사상 54집 / 한국신학연구소 / 1986년 / 521쪽
14. 독일 신비주의와 종교개혁 / 김기련 씀 / 신학과 현장 제 5집 / 1995년 / 262쪽